친구가 40년 전 빌린 돈을 갚겠다고 했을 때
얼마 전에 친구한테 전화 한 통을 받았어. 진짜 오랜만에. 강남에 살 때 이웃에 살았던 친구였는데, 재리에 밝은 친구였거든. 너네 어렸을 때 그 친구가 우리 집 일 많이 해결해 주고 다녔어. 알지? 네 아빠 회사 때려치우고 여기저기 사기당하고 다닐 때, 아빠가 땅 잘못 팔아서 세금만 엄청 나오고 그랬거든. 그러면 그 친구가 엄마랑 세무서 같이 좇아 다녀 줬어. 세금 좀 깎아보려고. 지금이야 그런 거 말도 안 되지만 그땐 사정 얘기하면서 말만 잘하면 세금도 막 깎아주고 그랬거든. 근데 그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 와서 그러는 거야.
자기가 옛날에 엄마 돈을 좀 떼어먹었대.
그때 세금 하나를 생각보다 많이 깎았던가 봐. 그때 한건 해결하고 나서 내야 할 전체 금액을 엄마한테 얘기하면서 엄마한테 돈을 좀 얹어 불렀다는 거야. 원래 내야 할 금액보다 훨씬 많은 돈을 깎았으니까, 그 친구도 수수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래서 돈 700만 원을 자기가 꿀꺽했다는 거지.
근데 이 친구가 최근에 어느 부흥집회에 가서 불을 받은 거야. 부흥사가 그랬대. 그동안 이웃한테 잘못한 거 있으면 가서 사과하고, 돈 떼먹은 거 있으면 다 돌려주라고. 그러다 보니, 40년 전 엄마한테 떼먹은 돈 생각이 났다는 거야. 그래서 엄마한테 전화를 했네.
700만 원. 그 돈을 이제라도 갚겠다고.
엄마도 첨엔 너무 놀랬지. 너도 알다시피 700만 원이면 적은 돈은 아니잖아. 얼마나 큰돈이니... 지금 우리 형편에. 사실 입 싹 닦고 있었으면 나는 전혀 모를 일이기도 했고. 말하지 않았으면 그 친구, 그냥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었잖아. 사람이 아무리 잘못해도 사과하는 게 싶니? 너무 고맙더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돈이 생긴다니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거 같더라고. 그래서 친구한테 말했지.
네가 고백한 것만으로도 너무 고맙다, 친구야. 500만 줘. 500만 받을게.
그래서 그날부터 기다렸어. 친구가 돈을 준다고 했으니,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게 되더라고. 왜 돈 준다면 받을 사람은 기다리게 되잖아. 근데,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도 연락이 없더라고. 혹시나 몰래 보냈나 해서 은행에 가서 가르쳐준 계좌로 들어온 돈 없나 찍어도 보고... 그렇게 기다렸는데도 기척이 없더라고. 참다못해 1달쯤 지났을 친구한테 전화를 했지. 근데 친구가 내 얘기를 듣더니 대뜸 이러는 거야.
"어머나? 내가 그때 돈 보내줬쟈녀. 그때 바로 보내줬는데?"
"아...? 아닌데... 아무래도 니가 착각한 거 같으다. 다시 한번 통장 확인해 봐라."
친구가 알았다고 하더라고. 지금 바빠서 그러니 확인해 보고 연락 주겠다고. 근데 친구가 또 연락이 없더라고. 그래서 기다리다 다시 전화를 했지. 친구는 그때도 그럴 리가 없는데.. 없는데.. 하더니, 내가 내 계좌를 찍어 보내고 낱낱이 확인을 시켜주자 다시 돈을 보내겠다고 하더라고.
그러고 간신히 돈을 받았는데... 기분이 영 찜찜한 거야.
호의로 생각하고 끝났으면 딱 좋을 일이, 자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거야. 생각해 보니까, 그 친구 말이야... 그 일이 있고 얼마 후부터 아파트를 하나 둘 사들이기 시작했거든. 그때 도곡 아파트가 엄마 기억에 600~700만 원 이면 샀거든. 그 친구는 그다음에 주공아파트를 사고, 진달래 아파트를 사면서 집을 차곡차곡 불려 가기 시작했고. 강남에 집 서너 채를 가진 부자가 됐지...
"에이,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아파트 한 채를 몇 백만 원에 살 수 있었다고?"
친정 엄마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듣고 있던 내가 믿기지 않아 노트북을 꺼내 탁탁, 검색을 때려 보았다. 강남 일대가 아직 진흙밭이던 40년 전. 서민들을 위해 지어진 공영 아파트로 분양된 도곡 아파트 시세는 찾지 못했지만, 몇 년 후 지어진 옆동네 30평형 대 은마아파트 시세가 걸려 나왔다.
은마아파트, 30평형 대 첫 분양가가 2천만 원 대였다!
그러니 서민들을 위해 18평~20평형대 초반에 분양한 도곡 아파트가 700만 원 선일 가능성이 있었다. 엄마의 친구가 엄마 돈 700만 원을 떼먹어 아파트를 한 채를 샀을 수도 있다는 신빙성 있는 추론과 함께.
나는 다시 노트북에 40년 전 물가 인상률을 검색해 보았다. 당시 1천만 원이 40년 후인 2020년 물가인상률을 반영하면 5천만 원 정도와 맞먹었다. 그러니 순진한 우리 엄마는 물가인상률을 순수하게 반영하면 3천5백만 원 상당의 돈을 고작 500만 원에 깎아주고도 그걸 읍소하며 받아낸 셈인데... 가만 보자, 이 돈으로 그때 도곡아파트를 샀으면 지금 몇 배야? 도곡동 아파트 한 채가 지금 20억 쯤 하지 않나? 그런 대체 그동안 몇 배가 오른 거지?
대략 40년간 물가가 고작(?) 5배 오를 동안, 강남의 아파트는 무려 10배, 아니... 100배가 넘게 올랐다.
얼떨결에 엄마 친구가 빌려간 돈 500만 원을 돌려받으며, 우리는 40년 사이 100배가 넘게 오른 아파트라는 거대한 진실과 맞닥뜨렸다. 우리가 팔지 않았다면,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직 우리 것이었을지도 모를 그것을 잠시 상상했다. 20억이라니, 100배라니...
역시 이런 숫자는 뼛속까지 평민인 우리에겐 타임머신이나 타고 가야 닿을 것 같은 먼 거리에 있었다.
참고) 40년 전 은마아파트 30평형대 분양가 : 1970년대의 아파트분양가를 아시나요? https://m.blog.naver.com/keheehee2/222138615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