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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Dec 17. 2020

28. 원칙

화목한 가정이라는 신화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도덕적 원칙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내가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망연자실하던 제인이 방에서 나오자, 문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로체스터의 참회가 시작되었다. 정략결혼과 아내의 광기, 차마 정신병원에 보낼 수 없어 손필드 저택 깊숙이 감추게 된 사연.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었지만 몇몇 정부를 거치며 더욱 스스로를 혐오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던 그 숲 속에서 제인을 보는 순간 자신의 진정한 사랑임을 확신했다고... 그 고백은 진실했다. 이성의 목소리와 감정의 목소리가 그녀를 흔든다. 이대로 그를 받아들인다면 제인의 사랑은 그를 절망에서 구원해낼 터이지만, 그것은 지금껏 자신이 지켜온 신념과 도덕적 원칙에 반하는 일. 그리고 이제 그녀는 둘 중 하나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  




내 어머니와 내 세대를 극명하게 가르는 단어 몇 가지가 있다. 의무와 도리, 권위, 신념, 거대 담론, 이분법적 사고. 어머니 세대를 관통하는 단어들이다. 어머니 세대는 유교적 잔재가 남긴 가부장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제도적으로 철폐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계급과 신분이라는 수직적 질서의 그림자가 곳곳에 남아 있었고, "~해야 한다"로 규정된 당위와 의무로 움직이는 사회였다. 여자들은 그 시대가 규정한 가치에 부합하며 살면 착한 여자, 그 질서에 벗어나면 나쁜 여자가 되었다.


개인의 취향, 탈권위, 미시 담론, 상대적, 해석과 다양성은 우리 세대를 가리키는 단어들이다. 우리는 자기 욕망을 감금당한 채 살아온 어머니들로부터 "너는 나처럼 살지 말라"는 하소연을 들으며 자랐고, 여자도 노력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 남자와 비슷한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결혼과 출산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가 되었고,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사는 것을 개성적이라고 부른다.   


그 사이 벽이 너무 높게 느껴지던 어느 날. 문득 내 어머니와 내 나이를 계산해 보니 나이 차이가 겨우 20-30년밖에 되지 않았다. 스무 살이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던 시대이니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는데도, 이 땅에 전쟁이 그친 지가 고작 70년 밖에 안됐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때만큼 놀라웠다. 늘 어머니 세대와 우리 세대를 전쟁 경험의 유무로 나누곤 하던 터라, 나이 격차에 대해서도 70년 정도는 되겠거니 생각하며 살았나 보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우리의 이 균열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고 위안 삼고 있었을까? 근데 우리 세대를 가르고 우리를 좁힐 수 없게 하던 그 수많은 가치들의 낙차가 고작 20-30년이었다니! 그 사이 우리에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백소영 교수의 페미니즘 입문서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전근대, 근대, 후기-근대를 거의 반세기 만에 경험한 사회죠. 서구 문명권에서 400년이 넘게 걸리며 진행된 것들을 이렇게나 빨리 해치웠어요. 서구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그러니까 전근대인 할머니, 근대인 어머니, 후기-근대인 딸이 ‘함께 살고 있는 사회’가 대한민국입니다. 세대 갈등이 유난 맞은 까닭도 여기 있지요." (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프롤로그 중. p.10)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우리 어머니가 결혼하고 우리를 키우던 시절엔 남편의 외벌이로 충분할 정도로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호황이었다. 중산층 비율은 급상승했고 여자들은 전업주부로의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만큼 여유로웠다. 그러니 그때만 해도 대다수 여자들은 여성 인권이니 구조적 문제에 관심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 이 사회의 '여성 응시'가 여전히 '근대적'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유고, 지금 그 논쟁이 이렇게까지 격렬해진 이유다.

그러는 사이 한 세대가 갔습니다. 미국에서 반세기 전쯤에 중산층 여성들이 겪었던 제도적 혼란을 오늘날 대한민국 다수의 젊은 주부들과 2030 세대 딸들이 겪게 되었죠. 자기를 희생하며 전업주부로 최선을 다해 딸들을 훌륭한 전문가로 길러낸 엄마 세대 덕분에, 지금의 딸들은 그야말로 경쟁력 있는 주체가 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회의 ‘여성 응시’는 여전히 ‘근대적’인 겁니다...한마디로 말하면 아빠는 출근하고 엄마는 가정을 지키는 근대적 기획은, 후기-근대를 살아가는 여성들 즉 바깥일을 하는 여성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구조라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이에 더하여 전근대적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여전히 가정 안에서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 보니 ‘추석에 전 부치고’ 대가족 단위로 행사를 치르는  전통 사회의 일들까지 잔재해 있죠. 이런 '일상'을 사는 젊은 세대로서는 그야말로 타임 슬립을 하는 기분으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p.10)


밖에서는 남자처럼 똑같이 공부하고 일했는데, 집과 시댁으로 들어오면 여전히 근대 여자이길 바라는 시선과 역할이 기다리고 있던 게 우리 시대라는 거다. 사랑과 배려와 희생이라는 아름다운 가치로 포장된, 차라리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면, 가족이라는 이름이 아니었다면, 반기 들기 훨씬 쉬웠을.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기에 부당한 감정을 삭히고, 욕망을 제어하며 여자들은 가정을 지켜야 했다. 화목한 가정이란 이상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철학자 강신주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에서 어머니 세대부터 우리가 부여잡고 온 이 '화목한 가정'이라는 신화를 무참히 내리꽂으며, 어쩌면 그건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가정이 화목하다고 뿌듯해하는 여인이 있다고 하자. 그렇지만 이것은 그녀만의 착각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 실제로는 그녀가 가족들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고 있거나, 아니면 가족들이 그녀의 욕망에 맞추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조화의 이념 속에서는 타자와 차이에 대한 경험이 발생할 수 없다.


조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가 주목하는 건 우리 어머니 세대가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우리'와 '공동체'적 가치가 '타자'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 됨'이란 이상은 2천 년 이상 우리 인류를, 그리고 전쟁 후 우리나라를 이끌어온 동력이었다. 그 힘으로 아무것도 없던 폐허 위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세웠고, 우리는 그 위에 평화와 편의를 누렸다. 하지만 하나 되기 위해 '타인'과 '다름'에 대한 개개인의 가치를 헤아리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손실은 '나'를 잃었다는 게 아닐까.  


가정의 화목을 자랑하려다 보니 가정의 화목을 자랑하던 여인은 ‘우리 가족’이란 집단성에 매몰되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국 그녀로 하여금 자신도 당당한 주체라는 사실을, 그리고 동시에 남편이나 자식도 자신과는 다른 타자라는 사실을 간과하도록 만든다. 타자가 나와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할 때, 그는 스스로 하나의 주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나는 누구인가, 나 자신으로 살기, 주체적인 나. 모든 철학이 추구하는 가치다. 타인을 이해하기, 함께 살아가기, 조화를 이루는 삶. 모든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다. 그리고 이 모든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있어야 한다. 나를 알아야, 남도 이해하게 되고, '나'의 욕망을 제대로 알아야 '타인'의 욕망도 제대로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과연 우리 여자들이 '나'로부터 무엇 시작해 본 적이 있었던가. '욕망'에 대해 들어본 적이나 있었던가.


어느 해 부부동반 모임에서 남편의 여권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수없이 많은 나라의 도장이 쉴틈 없이 찍혀 있는 여권을 넘기며 남편은 "가본 곳은 공항과 호텔뿐. 공항에 대해선 다 물어보라"며 껄껄 웃었다. 그래도 이웃 엄마들은 면세점을 매번 이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냐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남편이 1년에 10개국이 넘는 나라를 한 달에 2-3번씩 들락거리는 동안 나는 한 번도 남편에게 무얼 요구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형부. 언니 명품백도 좀 사다 주고 그러지, 왜 그러셨어요?"

옆집 엄마의 말에 졸지에 남편은 마누라 백 하나 사주지 않는 인색한 남자가  순간. 기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나 자신이 명품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던 거다. 명품에 대한 안목도 여유도 없었거니와, 안목이 있었던들 그건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이란 생각에서라도 부탁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 아내도 모르는 명품에 대한 취향을 남편이 알리 만무했고, 그 또한 그녀에게 없는 욕망을 챙겨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날  그 사건은 나와 내 어머니들이 '욕망'이라는 이름 앞에 취하는 어떤 태도를 연상시켰다.


각종 매체며 책 제목까지 '선을 넘지 말라'는 말이 유행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부모와 자식. 남녀와 부부. 온통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간섭하고 상관한다는 거다. 그것 때문에 함께 모일 때 즐겁지 않고 스트레스가 된다는 거다. 맞는 말이다. 모든 도를 넘어선 것들이 선을 넘는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들은 과연 선을 넘은 것일까. 그들 사이에 선이라는 게  있기나 했던가. 애초에 선이 없었던 게 아닐까. 세상은 또 말한다. '나'를, '자신'을, '욕망'을 찾아보라고. '나'의 바운더리가 있어야 너의 바운더리가 생기고, 자식과 며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평생 '가족'과 '우리'를 최고의 가치로 살아온 그들에게 이제 와서,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오늘은 그 옳은 말들이 지금 얼마나 어려운 말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그 말은 우리가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한다'는 말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그들에게 어려울지 모르겠다고. 그건, 한 여자가 평생 추구해온 가치와 들여온 노력을 반하는 일일 터이니. 사방은 지금 온통 관습과 기득 한 것들과의 싸움 중이다. 그러니 오늘 한번쯤은 늙고 고단한 그녀의 외로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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