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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울증과 미성숙

어느 쪽으로 전가하는 사람인가

by 쏭마담


언니, 근데 이거 우울증 맞아?


옆집 엄마 'A'가 자기 친구와 나눈 인스타그램 한 토막을 보여주면서 물었다. A는 지난주 아들 학원 수업이 있어서 오랜만에 강남역 근처 카페에 앉아 아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옛 생각이 난 A는 스타벅스에서 커피 한잔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강남 진출"이라고 쓴 그 글에는 순식간에 지인들의 안부 인사가 달리기 시작했다. 당장 달려가 같이 커피 마시고 싶다, 너무 보고 싶다, 그립다 등등. 그리고 몇 분 후. A는 친구 B부터 장문의 카톡을 받았다. "너무 서운하다"는 게 이유였다. A가 다른 사람의 답글에는 진한 그리움을 담은 '우는 이모티콘'을 두 개씩 붙여놓고, 자신의 답글에는 '우는 이모티콘'을 남기지 않고 글만 남겼다는 것. 그러곤 인스타를 차단하고 팔로우를 끊겠다고 했다는 거다.


'우울증 친구' B에 대해 들은 것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B는 A와 함께 속한 단톡과 개인 톡에서 이런 일로 차단과 재초청을 반복하고 있었고, 꽤 오래도록 B의 행동을 받아주던 A도 이제 어느 정도 진력이 난 상태. 어떤 식이냐 하면, 이 날처럼 아주 평범한 카톡에서 시작된다.


"아~ 오늘 너무 밥 하기 싫다."


밥 하기 싫은 거야 대한민국 주부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 달고 사는 말. 밥차림의 지겨움에 대해 몇 마디 토로가 오가고 나면, 서로의 저녁 메뉴를 묻고 하나 둘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부엌을 향하는 그런 의례의 전초전일 뿐이다. 그도 아니면 배달 음식을 시켜 한끼 때워도 그만. 하지만 B는 그중 늘 아무것도 선택하질 못했다. "시켜 먹으라" 하면 "집에서 노는 여자가 밥도 안 하면 아이와 남편에게 너무 미안하잖아"라고 했고, "나가서 간단하게 장이라도 봐오던가"라고 하면 그건 또 죽기보다 싫다 했다. 그리고 그런 뫼비우스 띠 같은 대화를 반복하며 A를 "붙들어 두었다". 혹 B가 상처 받을까봐 차마 모진 말을 못 하던 A가 이런저런 권유와 회유 끝에 진이 다 빠져버릴 때까지.


그리고 그건, 내가 사춘기 때 큰 아이를 겪으며 내내 하던 실랑이였다. 큰 아이는 요즘 흔히 말하는 예민한 과'에 속하는 아이였다. 옷에 붙은 라벨은 다 떼서 입어야 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손이 더러워질까 봐 본인이 특정한 곳에만 대고 잠들었다. 목이 늘어난 양말을 신지 못했고 맛을 구분하는 미감이 뛰어났다. 예민한 아이들의 감각은 보통 사람들보다 발달해 있기에 대신 머리가 좋은 편이다. 한번 들은 건 스쳐 들은 것도 잘 잊지 않았고, 공부감이 좋았다. 그리고 아이의 재능이 조금 특별해 보이던 어느 해 영재 학급에 신청해 아이를 밀어 넣었을 때만 해도 나는 아이의 문제가 뭔지 잘 몰랐다.


영재 학급에 들어가자 아이는 주말 7-8시간이나 되는 수업을 너무 재밌게 듣고 나왔다. 아이는 새로 배운 내용들에 흥분했고, 눈빛을 빛내며 설명했다. 기대했던 것처럼 양질의 수업이었다. 다만 영재 학급은 수업료가 없는 대신 아이들에게 1년 과제를 내준다. 학기 초에 자신이 연구할 주제 하나를 선정해서, 꾸준히 실험 및 연구한 다음 학기 말에 보고서 1편을 작성해 내야 하는 것. 미제출 시 다음 해 영재 수업의 기회가 박탈된다. 그리고 평상시 아이와 함께 뭔가 공부하는 그런 학구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던 우리에겐 그 보고서가 적잖이 부담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반, 주제를 정해야 하는 마감일. 아이는 몇가지 제안한 주제 중에서 아무 것도 결정을 못했고, 어쩔 수 없이 아이 대신 후보 주제 중 하나를 정해 제출했던 것이 시작이었다. 한 고비를 넘긴 아이는 다시 과제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도서관에 가서 관련 도서를 찾아 아이 앞에 늘어놓아도 보고 실험 키트를 사서 들이밀어 보아도 끄떡 없었다.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다른 주제로 바꿔도 된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 D-day 몇 달 전, 몇 주 전에 한번씩 과제를 상기시켜도 듣는 둥 마는 둥. 그러는 사이 시간이 흘러 마침내 결과 보고서 제출 마감일을 몇 주 앞둔 어느 날. 아이가 뒤집어졌다. 관련 키트와 자료를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이제 와서 주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시간이 너무 지나버려 완벽한 보고서는 어려우니 완성도를 버리라고 하자 그건 또 싫다고 울부짖었다. 나는 이미 반쯤 낙제를 각오한 터라 사실 그대로를 말해줄 수밖에 없다.


"이 과제를 학기 초에 선정하라고 하신 건 네가 오랜 시간 공부하길 바라신 거지, 단지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해 학기 초부터 내주신 게 아니야. 그러니 남은 기간 동안이라도 최선을 다해 공부해 보고 공부한 만큼만 제출하던가. 그럴 생각이 없으면 엄마는 보고서를 내지 않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아이는 그렇게 되면 다음번 영재 수업 기회를 잃게 되니 그것도 안된다고 했다. 대가는 치르기 싫고, 망신도 당하기 싫고, 불이익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것. 아침부터 아이와 옥신각신 하는 걸 듣던 남편이 출근을 하루 미루고 아이 일에 개입했다. 간신히 아이 감정을 수습하고 남은 몇 주라도 과제에 집중하여 엉성한 보고서라도 '내는 것'을 목표로 하자고 합의하며 어찌어찌 사태를 수습했지만...그 날 이후 나는 그간 아이의 예민함 때문이라고 실랑이하던 몇 가지 일들이 어쩌면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미성숙의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오래 기다려 받은 축구공 혹은 요요 선물에 0.1mm 정도의 흠을 발견하고는 목놓아 울던 어느 날 같은 것. 한 번만 돌리면 금새 수십 가지 흠이 날 그게 뭐라고, 0.1mm의 흠 때문에 밤새 끙끙 앓는가 말이다.


그 후로 미성숙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두 단어가 생각난다.


완벽증과 선택(책임), 혹은 훼손과 대가.


아직 아이일 때야 근사한 것들을 보면 무조건 당장 손에 넣고 싶겠지. 이면에 숨은 수고와 대가가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그렇게 우리는 자라며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하고, 처음부터 완벽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선택에 대해선 책임을 져야 하고, 싫어도 실패라는 오점을 몸에 묻히고, 나도 실수란 걸 하며 완벽하지 않는 인간이란 걸 배워야 한다. 하지만 걔중엔 실패가 두려워 혹은 부모가 대신 막아주며 실패감을 경험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는 사람이 종종 있다. 운 좋게 자기가 원하던 좋은 결과에 이르면 그 사람은 그 성공이 오로지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패가 다들 남들 때문이라고 탓한다.


B의 경우, 아무 선택도 하지 않아도 되던 배후에는 자신의 불행과 한탄을 받아주는 착한 지인들이 있었다. B는 어렸을 때부터도 습관처럼 자신의 불행을 토로하곤 했다고. 남매들 중에 언니 오빠는 다 예쁘고 잘생겼는데 유독 자신만 못생겨서. 다들 좋은 직장에서 잘 나가는데 자신만 집에 있어서. 나만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그래서 자신은 불행하고 우울한 거라고. 언니 오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좀 부족할지 몰라도 객관적으로 B는 그렇게 빠지는 외모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도 아니다. 성실한 남편은 늘 우울해하는 아내의 마음을 보듬고, 딸도 야무지게 자기 일을 챙기며 엄마 마음을 헤아린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어느 순간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시키고, '불행'이라고 계속 이름 붙여주며, '우울'을 키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주변의 동정과 관심을 끌기 위해 계속 투정을 부리며 사고 치는 어린아이처럼.


우울은 어떻게 시작하여 우울감이 되고, 우울감은 어떻게 자라 우울증이 될까.


그리고 어느 날 내가 B의 우울을 보면 불행한 우울이 우울증으로 자라는 그 어디쯤에 미성숙과의 교집합이 있지 않을까 싶다고 물었을 때, 상담사인 후배가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 선배. 우울증은 남 탓하지 않아요. 오히려 지나치게 자신 탓을 하죠.


그러고 보니, 최근 읽은 우울증 책 속의 저자들도 모두 화살이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들이 보여준 우울은 오히려 너무 책임감이 강하고 의지적이어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무기력을 어찌하지 못해 당황하고 있었다. 부지런하던 자신이 이렇게 손도 꼼짝 못 하게 되어서, 그렇게 인생의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 세상 모든 것이 무가치게 느껴져서. 그들은 모두 '하는' 사람이었다. 의미를 추구 '하고' 대가를 '치르고' 치열하게 '달려가는' 책임 있는 사람.


적어도 그들이 지나칠 정도로 대가를 치르는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그건 어디를 바라보는냐의 문제는 아닐까. 누구나 살면서 겪는 우울이 계속 '자기 자신을 향해' 댓가를 치르라 할 때 우울증이 되고, '외부를 향해' 네 탓이다 할 때 미성숙이 되는 건 아닐까. 세상엔 몇백 억대 뇌물과 횡령 의혹에도 멀쩡히 잘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고작 가족이 받았을지 모를 시계 하나에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이 훼손을 못 견뎌하는 것만은 미성숙과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금 조심스럽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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