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내 욕망을 제한하고 내 삶을 규정해서
나한테 있어 가난은 타락과 비슷한 말이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뇨. 가난한 사람들하고 살고 싶지 않아요.
붉은 방에 갇혀서 발작을 일으킨 제인 에어에게 한 신사가 방문한다. 약제사 로이드 씨. 제인을 치료하러 왔던 그는 제인에게 제안한다. 혹시 가난하지만 착한 친척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살겠냐고.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저택 게이츠헤드를 떠날 수 있겠냐고. 하지만 제인은 순진한 동화 속 주인공처럼 "네!"라고 대답하지 않는다. 지금껏 누려온 특권을 저버릴 만큼 자신이 용감할 것 같지 않다. 대신 그녀에겐 제3의 선택지가 주어진다. '기숙사'라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가.
<제인 에어>의 작가 샬롯 브론테가 두 살 되던 해에 출간된 소설이 있다. 당시 보기 드문 여성 작가 M.W. 셸리(물론 당시 남자 이름으로 출간되었다)의 작품이자 괴기소설인 <프랑켄슈타인>이다. 죽은 자들의 뼈를 이어 맞춰 탄생한 괴물 '프리처'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 '프랑켄슈타인' 박사로부터 생명을 부여받는다. 만화와 영화에서 오마주 되듯 그는 처음부터 사악한 영혼은 아니었다. 누군들 끔찍한 몰골을 한 채 태어나고 싶을까. 하지만, 그는 믿었다. 이 세상이 훌륭하다면, 선량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끔찍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의 가치를 알아줄 거라고. 그는 단지 행복한 이들과 함께 행복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을 보자마자 그간 그가 모습을 감추고 베풀던 호의를 배신하고 소리를 지르며 모두 도망가버린다. 그는 외로웠다. 배신감에 울부짖는다. 불행했기에 사악해졌다.
그 당시 인간들에게 가장 높은 가치는 ‘부와 결합한 고귀한 혈통’이었다. (<프랑켄슈타인> 160p) 그걸 바꿔 말하면 다시 <오만과 편견>의 그 유명한 첫 문장이 된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참정권은커녕 상속권 조차 없던 시절. 스스로 돈을 벌 수 없고, 좋은 남편감을 구하는 일만이 최고의 가치이던 그 시절. 여자들의 가장 훌륭한 남편감은 바로 이 부와 결합한 고귀한 혈통의 남자였다.
10여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집안에 들어앉았다'. 더 이상 어린이집에 아이를 등 떠밀고 울부짖는 아이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도망치지 않아서 좋았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유치원 차가 올 때까지 TV 앞에 앉아 기다리는 아이 허벅지를 베고 눕는다. 눈 앞에 아침 햇살을 받고 발그래해진 앙증맞은 발가락 열 개가 보인다. 그 여유로움이 너무 좋았다.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등에 업고 집까지 걸어오는 길도 어찌나 행복하던지. 살포시 잠이 든 아이가 내 등에 꼬옥 매달려 있다. 등 전체로 아이의 작은 숨이 오르락 내린다. 네 곁에 있어줄게. 다신 등 떠밀지 않을게.
하지만 얻은 것이 준 행복만큼 내가 포기한 것들로 인해 현실은 제한됐다. 이제 남편의 월급으로만 살아야 했다. 그건 내 기분에 내켜 한 번씩 호기를 부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카드 할부 대신 뒷자리가 9천원 단위로 떨어지는 옷을 사야 한다는 것이고, 남편 몰래 시댁이나 처가에 용돈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고, 서점 대신 도서관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내 쓰임을 제한하는 건 참을 만했다. 타고나길 백화점이니 명품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아이 밑에 들어가는 것이 제한되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내 욕망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전업맘이 된다는 것은 각종 이웃집 정보에도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국영수 같은 필수 사교육부터 피아노, 축구, 생태 따위 선택 사교육까지. 이웃집 사교육의 질과 가짓수는 그대로 그 집의 경제력을 의미했다.
큰아이 초등 저학년 즈음 엄마들 사이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주로 언어 연수를 빙자한 해외 체류기 같은 것이었는데, 방학이 끝나면 해외 연수를 다녀왔다며 보기 좋게 얼굴이 그을린 아이들이 반에서 서너 명쯤 되었다. 방학을 이용해 현지 아이들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익혀 온다는, 엄마들이라면 누구나 혹할 수밖에 없는 사교육 프로그램. 여유가 있는 집은 미주나 호주 쪽으로, 눈높이를 낮추면 말레이시아나 필리핀으로. 그건 엄마들의 역량과 재력을 암묵적으로 서열화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는데, 그 피라미드 구조 가장 정점엔 엄마 본인이 직접 유학을 가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케이스가 있다. 남편이 기러기가 되는 구조이긴 해도, 우리들 사이에선 그런 엄마를 가장 파워풀하고 독립적인 여자라고 인정하곤 했다.
그리고 피라미드 맨 마지막 즈음에 국내 한 달 살기가 있다. 먼 거리로 비행기를 타고 나갈 수 없는,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는, 국내라서 한 달 생활비로도 가능한 제주도 한 달 살기다. 전업주부로 지내며 큰일 벌이는 데엔 간이 콩알만 해진 나에게 충분히 바라볼 만한 것이었다. 친한 엄마 셋과 반나절 만에 합을 맞춰 숙박을 끊었다. 고작 10일에, 16평짜리 빌라에서 엄마 셋과 아이 일곱이 함께 지내는 생활이었지만 재밌었다. 카니발 한 대를 빌려 아침마다 바닷가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며 행복했다. 까맣게 익어가는 줄도 모른 채 모래성을 쌓아 성을 짓는 아이들, 가로수 밑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사방치기'를 하며 깔깔거리는 아이들. 제주 바람을 잔뜩 등에 인채 오름과 오름 사이를 내달리는 아이들... 그렇게 10일을 함께 지내고 마지막 날 저녁. 케이크 하나를 앞에 놓고 서로 아쉬움을 토로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생일 축하 음률에 맞춰 “제주 생활 즐거워~ 제주 살기 행복해. 제주 살기 아-쉬-워~~~ 다음에는 해외로!”를 부르며 다음 행선지로 해외 한 달 살기를 기원했다. 맞벌이 때 없었던 시간이 이젠 내게 넘치도록 있었으니까.
며칠 후 나는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해외 한 달 살기에 대해 운을 띄워본다.
“제주에서 애들 너무 행복해하니까 좋더라. 주희 엄마가 다음에는 외국에서 영어도 배울 겸 한두 달 살다 오자 하는데... 어떨까? 당신 마일리지 있으니까, 비행기 값은 굳었고, 생활비 조금 아껴 쓰면 다녀올 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
순간 제주도 다녀오더니 이 여자가 미쳤나, 하는 표정으로 남편이 쳐다본다.
“야, 내가 그 마일리지를 어떻게 모았는데...!”
단 한마디로 가슴에 못이 박히는 순간이 있다. 농담으로, 그저 진지한 주제로 넘어가기 위해 슬쩍 던져보는 말이었을지 모르는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혀 잊히지가 않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 둘을 키우며 맞벌이하던 당시 남편도 지금과 똑같았다. 그는 늘 밖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사원이었고, 회사에서 전력에 전력을 다하다 집에 들어왔다. 영혼이 다 털린 껍데기로. 그리고 나는 그걸 너무 잘 알았다. 어느 날처럼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두 아이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안 자겠다고 보채는 아이를 간신히 재우고 멍하니 식탁에 앉아 있던 나. 11시가 되어 퇴근해 들어온 남편에게 이렇게 물었던 듯하다.
“당신은 집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해?”
“집...? 집은 쉬는 곳이지.”
나처럼 텅 빈 동공을 한 채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런 눈 앞에서 내가 더 이상 어떻게 그에게 따져 물을 수 있었겠나. 그 잘난 회사는 당신만 다니냐고. 육아에 있어선 왜 나만 맨날 디폴트여야 하냐고. 묻지 못했다. 그는 그저 공부만 잘하면 성공할 줄 알고 키워진 대한민국 여느 가부장 집 둘째 아들에 다름 아니었고, 나 역시 맞벌이가 무엇인지 모르고 털컥 두 아이를 낳은 대한민국 삼십 대 여자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은, 그 외의 생각을 하며 살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몇 번 더 기회가 있었다. 형님이 말레이시아에 1달짜리 숙소를 빌렸다고, 동서도 애들 데리고 와서 같이 지내면 참 좋겠다고. 그때 한번 더 용기 내어 남편에게 얘기해 보았다. 인간은 어쩜 그리 한결같은지. 그때 핑계는 강아지였다. “'피치'는 어쩌고?” 내 굳어진 표정을 보고, 뒤늦게 아주버님과 통화를 하고 난 남편은 그제야 다녀오라고 허락을 했지만, 그 이후로 내 마음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편에 대한 내 마음의 응어리는 이 이야기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그는 지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 어렵다는 직장에서도 아직 잘 버티고 있다. 하지만 늘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남편은 여태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살 집 한 채를 마련하지 못했다. 부동산과 금융 자본이 늘 노동 자본을 앞서 가기 때문이다. 남편 탓이 아닌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자주 불행하다. 그가 이웃 남자처럼 더 많이 벌어다 주지 못해서. 그게 내 욕망을 제한하고, 내 삶을 규정해서. 남편에게 빌붙어 사는 주제에 다른 여자들처럼 수완도 없어서.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마음껏 출판할 수 있는 세상이 됐는데, 여전히 남편 탓이나 하고 있어서.
그렇게 내가 점점 사악한 여자가 되어 가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