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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Jun 07. 2024

결혼할 때 부모님께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내가 그때 '조건 좋은 남자'에게 시집갔더라면?



결혼할 때 부모님께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언니와 오빠가 결혼할 때에는 경기도 일대 작은 아파트 전세라도 하나씩 해주셨으니 셋째인 나만 아무것도 받지 못한 셈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모은 돈이 얼마간 있었고 직장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아쉽지 않았다. 친정 부모님이 당시 여유가 있으셨다면 당연히 언니 오빠 못지않게 해 주셨을 거라는 걸 알기에 이에 대해 한 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동안 키워주시고 공부시켜 주신 것만으로도 나는 당연히 감사했다.


내 주변 여자들에게도 물어보니 대부분 나와 비슷했다. 오빠나 남동생은 결혼할 때 자연스럽게 부모님이 전세라도 집을 얻어주셨다고 했다. 하지만 딸인 자신이 결혼할 때에는 '거저' 보내는 것 또한 자연스러웠다고 했다. 그때는 그랬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여자가 '조건이 좋은 남자'와 결혼할 때. 여자가 의사나 법조인이나 부잣집으로 시집갈 때에는 없는 형편에도 빚을 얻어 지참금을 마련해 주었다. 집안끼리 맞선 보고 결혼하던 중세나 근세도 아니고, 모두 자유결혼을 하는 시대가 된 지 백 년이 넘었건만 여전히 관례가 그랬다.


우리 집만 해도 언니가 '의사'와 연애하고 결혼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사'자 달린 사위를 맞이하게 된 케이스. 당시만 해도 의사는 열쇠가 최소 3개(집, 자동차, 병원)는 되어야 된다는 말이 우스개처럼 오갔다. 형부는 키도 크고 잘생긴 데다 당시 제일 잘 나가던 정형외과였다. 형부가 만약에 결혼정보회사나 뚜쟁이들에게 팔려 시장에 나갔다면 열쇠가 5개 라도 서로 모셔가려 했을 조건이었다. 그런데 언니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평범하기는커녕, 한창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집안의 사위로 들어오게 됐다. 그러니 부모님이 언니 결혼식 지참금으로 경기도 일대 작은 아파트 전세를 하나 해주었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해주지 못해 안달했지, 딸인데도 집을 마련해 주는 것이 드문 일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부모님의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한 건 그 이후부터다. 결혼하자마자 양가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기 시작한 언니는 지금까지도 매달 각각 100만 원씩 친정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고 있다. 노후 대책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던 부모님께는 연금과 다름없는 귀한 돈. 결혼 당시 친정 부모님이 해주신 아파트 전세의 몇 배에 달하는 경제적 부양을 하고 있으니 그때 받은 지참금을 이미 몇배로 갚고도 남은 셈이다. 딸이 조건 좋은 남자를 데려와 결혼하는 바람에 부모님은 얼결에 인생 처음으로 매우 성공적인 투자를 하신 셈이다.  


그리고 그런 언니를 따라 나의 경제규모도 엇비슷하게나마 커져나갔더라면 지금처럼 내가 언니와 나의 결혼에 대해 다시 되짚어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명절에 가족이 모일 때마다, 부모님을 위한 뭔가를 도모할 때마다, 언니는 점점 더 효녀가 되어 가고 나는 점점 더 못난 딸이 되어 갔다. 명절에 용돈을 드리는 액수부터, 기념일에 해외여행을 보내드리는 것까지. 언니는 계절이 지날 때마다 부모님을 모시고 백화점에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계절옷을 바꿔드리며 부모님의 불운한 노년을 다분히 효과적인 방식으로 달래 드리고 있었다. 이뿐인가. 때가 되면 돌침대를 넣어드리고 임플란트와 보청기를 하라며 몇백만 원 씩을 척척 내어드렸다. 언니와 나의 간격은 세월이 지나며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와 결혼하기 전까지 언니는 나와 별반 다름없는 조건의 여자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결혼하고 일을 그만둔 뒤에도 대학원까지 다녔던 언니와 달리 나는 결혼 후에도 몇 년 간 맞벌이를 하면서 경제활동에 기여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개별의 여자로서도, 하나의 부부 단위로서도, 우리 부부가 특별히 언니 부부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외벌이가 되면서부터 우리의 경제규모는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이 되었다. 비슷한 조건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했던 두 여자의 삶의 조건이 어떤 직종의 남자와 결혼하느냐에 따라 어느 순간부터 현격하게 달라졌다. 처음엔 언니가 K-장녀라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각별한 데다 아무래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우리 보다 더 많이 더 자주 효도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것 또한 사실이며, 그 모두가 내겐 너무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대여섯 배의 차이가 날 정도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질문해 올라가다 보니 우리는 출발점에서부터 달랐다.


만약 그때 부모님이 언니에게 해준 것처럼 나에게도 똑같이 지원을 해주셨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결혼하고 우리가 집을 얻을 때 전세가 아니라 매매로 집을 얻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은행에 갚아야 할 이자를 매달 모았을 테고, 그랬다면 그 돈은 고스란히 20년 후에 우리에게 2억 이상의 현금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20년 동안 적어도 서울 아파트가 3배 이상 올랐을 테니 지금쯤 시가 7억쯤 하는 아파트와 현금 자산을 합치면 우리는 대한민국 중산층 정도의 규모는 유지하고 살았을 거라는 것.  


그랬다면 지금 언니가 부모님께 하는 것의 반 정도라도 나도 체면치레 하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우리가 가족모임을 할 때마다 내가 철딱서니 없이 나이만 먹은 어른이 되었다는 그런 자괴감 따위, 지금보다 덜 느끼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조건 좋은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고, 그래서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자본을 축적하지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살 수밖에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경제적 규모는 더 이상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의 규모로 벌어지게 되었다. 쓸데없는 사고 실험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라도 거슬러 올라가는 생각들이 내게 조금의 위안이 되어 주었다. 꼭 내가 무능해서만은 아니야. 구조적인 부분도 있었던 거야, 하면서.  


우리 부모님 세대의 경제적 호황을 지탱하는 근저에 부동산이 작동하고 있었듯, 우리 세대 경제적 불황의 밑바닥에도 이렇게 부동산이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오늘날 내 삶의 조건과 능력치, 그리고 공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얼마나 감안하며 이야기 나누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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