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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Oct 03. 2015

인성교육 비판

최근 국회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이 만들어지고 교육부는 시행령을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이 아이들이 남겨진 배를 버리고 도망간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정작 아이들을 팽개치고 간 건 어른인데 아이를 대상으로 인성을 교육하겠다는 모양새도 모순이지만 교육을 통해 인성을 키우겠다는 발상도 우습다.


그동안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등한시해서 지금과 같이 온갖 범죄가 성행하고 비리와 탐욕스런 인간이 나왔는가? 그래서 법으로 인성교육을 제도화하면 인성이 뛰어난 인간이 배출될 수 있을까? 선생 혼자 떠드는 수업으로 아이들의 인성을 바르게 하겠다고? 외워서 시험보고 높은 점수를 얻으면 대단한 능력을 갖춘 듯 자격을 부여하는 체제에서 인성도 자격요건을 갖추는 시험을 보게 하고 자격증을 주려고 하는가?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오히려 불편해하는 선생이 많다는 것이다. 몇 해 전 지각에 대해 한 선생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대부분 성실을 키우기 위해 지각하지 않기를 강요하고 지각자를 처벌하는데 그게 성실을 과연 키우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해본 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성실을 시간 지킴으로 한정짓고 그걸 어기면 성실하지 않음으로 결론짓는 편협한 문화에 익숙한 탓이리라.


행동을 통제함으로 인성을 키울 수 있다는 믿음은 신화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잘못된 근거없는 믿음이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으로 그 사람의 인성을 판단하지만 사실 행동은 얼마든지 마음과 따로 놀 수 있다. 즉 마음에는 전혀 없지만 행동은 할 수 있다. 그럼 사람을 가리켜 이중인격자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학교는 지금도 여전히 인성교육을 한다. 하지만 제대로 하지 않을 뿐이다. 아니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그냥 이런 거 하면 되겠지 하며 막연한 기대가 있을 뿐이다. 그런 기대를 하며 열심히 뭔가 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 것을 비판하며 개선해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때문에 인성교육을 다르게 보지 않고 여전히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인성교육의 가장 큰 폐해는 수동성이다. 인성교육의 요소 중 예절을 예로 들어보자. 예절을 지키라 하지만 수직적 구조 내에서만 작동하는 예절일 뿐이다. 윗사람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규칙은 윗사람이 잘못해도 따지지 말고 넘어가라는 말로 와전되었고 윗사람한테 모욕과 수치를 당해도 얼굴 표정 변하면 안되는 굴욕으로 왜곡되어 있다. 본디 예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규칙인데 힘의 논리가 예절의 본질을 가리고 권력 앞에 순응하란 메시지로 뒤바꿔 놓은 것이다. 나머지 요소도 마찬가지다. 소통하라면서 질문은 여전히 금기시한다. 질문도 가려가면서 하거나 분위기 보면서 해야 한다. 말대꾸 하지 말고 어른이 말할 때는 고개를 숙이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통의 정의를 외우고 소통의 좋은 예를 고르는 문제로 소통을 가르치는 것 말고 진짜 소통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교육은 문화를 바꾸는 작업이다. 그래서 문화를 직접 경험하게 하고 더 나은 문화를 만들 수 있는 생각과 힘을 키우는 작업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놓은 인성교육은 필시 이중인격자만 양산할 것이다. 그런 인성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반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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