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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Dec 06. 2015

분노 극복은 슬픔이다

분노는 2차 감정이고 슬픔이 1차 감정이다.

나는 욱하는 성질이 있다. 선생으로 살다보면 이게 자주 튀어나온다. 지역 교사 모임에서 수업 이야기를 하면 항상 욱한 이야기가 나와서 어떤 선생님은 나에게 분노조절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수업이 적으면 행복하다. 이건 단순히 쉬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 분노를 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뭔가를 말로 설명하며 가르치는 수업일 경우 정말 힘들다. 1분을 참지 못하며 내 말에 자기들 말을 섞는 아이들. 단 1분도 이야기 안했는데 이해도 못한 아이들. (이런 애들도 잘 들을 때는 다 대답하기 때문에 내가 설명을 명확히 못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수업이 시작되어 내가 말하기를 시작했는데 계속 자기들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 내 말을 파묻는 아이들. 정말 내 화를 내뿜게 하는 촉발자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내 화를 불러일으키는 자들일까? 그들이 내 말을 의도적으로 듣지 않고 날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해도 그들이 진정 내 화의 원인일까? 우리는 화가 나면 상대방이나 다른 무엇에 원인을 돌리면서 비난하는 경향이 있다. 화가 나면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반드시 내질러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지 화를 받아낼 대상을 재빨리 찾아 쏟아붓는다. 만일 대상이 없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 그러니까 화를 표출하면 오히려 더 위험해질 때 화는 자신 안에 남아 화병으로 발전한다. 이런 경향 덕분에 아이들이 내 화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내 화를 받아줄 약한 대상이기 때문에 말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화는 내 기대와 욕구의 좌절로 생기는 에너지다. 내 말을 잘 듣고 질문하거나 수업 활동을 진행할 때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 결국 화라는 에너지는 내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내게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기대를 아이들이 충족시키지 않을 때, 쉽게 말해 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그들을 내 통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나는 강한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것이 화인 것이다. 이 공격적인 화라는 강한 에너지는 그들을 일순간에 제압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아이들은 조용해지고 분위기는 숙연해지며 수업은 조용히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뒷맛이 결코 개운하지 않다. 후회가 밀려온다. 내 화가 정당화될 수 없음에 대한 후회이고 아직도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 나에 대한 실망이다. 그렇다고 애들한테 미안하다고 하면 도무지 나를 가늠할 수 없는 인간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아이들에게 쏟아붓는 내 화는 일종의 복수심이다. 이것들이 내 말도 듣지 않고 날 무시해? 가만두지 않겠어. 이런 류의 복수이다. 생각해보면 째째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수업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내가 하는 욱은 수업의 질서를 세우지 못한다. 욱하는 방식에는 폭력이 내재되어 있어서 기본적인 배움의 욕구를 억압한다. 욕구가 배제된 곳에서 배움은 강요로 이루어지기 쉽다.


분노는 무시받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되니 2차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내 말이 전혀 통하지 않으니 수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불안이 질서를 확실히 세워야겠다는 의지를 만들고 그 표현으로 분노가 나오는 것이니 그렇다. 2차 감정으로는 소통이 이뤄지지 않고 마음이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좋지 않다. 1차 감정이 연결을 만들어준다. 그게 슬픔이다. 슬픔은 눈물이 꼭 나와야 하는 게 아니다. 슬픔은 기대와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생기는 감정 중 하나이다. 그러나 슬픔은 내 욕구가 채워지지 않음에 대해 가장 근본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이다. 욕구의 좌절을 갖고 있으면서 곱씹으면 결국 자신에게 해를 끼치기 때문에 떠나보내야 하는데 그 상실감과 연결되는 게 슬픔이다.


이를 내 수업 중 욱하는 것과 관련지어보자. 나는 수업 시작을 내 생각을 말하면서 시작한다. 수업은 이렇게 할 거야. 그 이유는 이거야. 그것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으면 말해줘. 그런데 그런 말조차 듣지 않으면 수업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또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강하게 나간다. 이 때 발생하는 게 욱이다. 이게 반복되면 욱은 점점 강해진다. 그런 후에는 온 몸이 떨린다. 내 말을 듣지 않음은 수업을 잘 하고 싶은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소통하고자 하는 욕구, 배움이라는 끈으로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의 좌절을 가져온다. 그 순간 내 안에 차오르는 슬픔은 너무도 순식간에 불안과 무시받음에 대한 분노로 바뀐다. 결국 나는 불안에 정복되는 것이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1차 감정인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아이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슬픔을 느낀다면 나는 욱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쏟아붓는 비난을 멈출 수 있다. 내 욕구가 좌절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잘 되지 않고 실패를 거듭함에 대한 슬픔이다.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허전함과 공허함에 대한 슬픔이다. 아이들과 연결되지 않고 분리된 상태에 대한 슬픔이다. 소통구조를 만들어가는 게 그토록 힘이 든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이다.


내가 수업을 못한다는 자책이 아니다. 아이들이 기본 예절도 갖추지 않음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화는 멈출 수 없다. 합리화란 추진연료로 더욱 강하게 분출할 것이다. 단지 잘 되지 않고 자꾸 막히고 연결이나 유대가 희박함에 대한 슬픔이 필요하다. 이거 하나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느끼지도 못하고 분노로 치환하는 것보다 충분히 느끼는 것이 분노로 내 삶을 파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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