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에 대해
인사이드 아웃은 생각할수록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이번에는 슬픔이에게 집중해보련다.
난 이 영화 후에 줄곧 우울증이 떠올랐다. 슬픔이의 역할이 강조되는만큼 우울증의 위험성도 커졌다. 나도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는 정말이지 자살충동에 휩싸이고 내 가치는 바닥에 곤두박질 쳐있고 별로 쓸모 없는 삶이라고 여겨졌다.
영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기쁨이가 슬픔이를 버리고 혼자 탈출하다가 기억 쓰레기로 떨어진 후 슬픔이는 최고조의 감정상태에 도달한다. 자기 존재가 슬픈 것이다. 기쁨이가 기억 쓰레기장에서 탈출하고 슬픔이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우울증에 빠진 후였다. 구름을 타고 다니며 눈물이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나는 쓸모없어라고 하면서.
슬픔이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슬픔이가 모든 걸 주도하게 내버려두는 건 결코 좋지 않다. 슬픔이가 극대화될 때 우울증이 찾아오고 자기 존재에 의심과 회의가 든다. 또한 슬픔이는 에너지가 별로 없다. 장기기억 속에서 기쁨이가 슬픔이 발을 잡고 끌고 다니는 장면이 그것이다. 슬픔에는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슬픔에 빠져들수록 무기력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슬픔은 자기 역할이 있다. 상실에 대한 역할이 끝나면 기쁨이 찾아오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를 의도적으로 막고 슬픔이를 더 강화시키면 이 역시 감정의 흐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감정을 통제함으로써 다른 감정들이 죽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면 우울증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일까? 난 그렇다고 본다. 감정이 성숙한 사람은 감정의 역할과 흐름을 잘 안다. 그리고 적절히 표현하며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어느 하나의 감정에 집착하게 된다. 첫째는 그 감정에 익숙하고 다른 감정에는 불편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화를 억압하며 살아온 사람은 화를 못내고, 슬픔을 누르며 산 사람은 눈물이 메말랐다. 이처럼 기쁨을 억누른 사람은 우울증이 편하고 익숙한 것이다. 둘째는 익숙함을 자연스러움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한사코 덜 익숙한 감정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우울증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다. 자기 존재가 의심스럽고 쓸모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이유는 분명 나름의 뚜렷한 이유가 있다. 어릴 적 폭행을 당해서, 부모에게서 인정받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해서 등 사회적 거부와 배척, 폭력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다. 하지만 누구나 상처는 갖고 있다. 그 정도가 심하더라도 현재 지금의 삶에 주는 영향이 미비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울증인 사람은 현재 지금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끊임없이 인식하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상처가 현재에 주는 영향을 차단할 에너지를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상태가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변화를 주저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용기가 없다.
기쁨이 자기 역할을 하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삶이 슬픔에서 즐거움으로 바뀌려면 긍정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에너지는 환경같은 외부에서 공급되기도 하지만 내면에서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차단되어버린다. 그래서 받아들임이 필요하다. 인식이 바뀌려면 외부의 영향이 필요한데 그걸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기쁨에서 슬픔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전환이 자연스러워야 다름 감정과도 교류가 일어나고 각 감정과 마주하면서 충분히 느끼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슬픔을 충분히 느끼되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지 말아야 한다. 만일 필요 이상으로 머물기를 선택하는 건 변화를 두려워해 무기력을 선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사랑을 생각하라. 이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