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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형 Jul 25. 2015

학교의 폭압

학교는 교육기관인가?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나올 때였다. 학교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 중 하나가 학생에게 인권이 어디 있겠냐며 나에게 동의를 구하며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냥 얼떨결에 '네'라고 대답했지만 그의 말은 지금까지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당시 학생인권조례는 파격적이었다. 영상에 나온 학생들의 모습은 짧은 치마에 화장을 한 여학생이 주를 이루었다. 지금은 짧은 치마에 대해서 엄격한 규제를 하는 학교가 이전에 비해서 줄어들고 있는 추세지만 그 당시는 학생의 복장에 대해서 엄격하게 제한하던 때였다. 학년 담임들이 서로 반을 바꾸고 들어가서 두발, 손톱, 복장을 검사해서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은 재심사를 했다. 학생들은 그 날에 걸리지 않으려고 평상시와는 다른 점잖은 복장을 입었다. 눈치없이 걸린 학생들은 예외없이 재심사를 통과해야 했다. 몇몇은 줄인 바지나 치마를 세탁소에서 수선한 후에 검사를 받아야 했지만 많은 아이들은 친구 것을 빌려 입거나 집에 하나는 점잖은 걸 마련하는 수법으로 통과하곤 했다. 


교사회의가 있는 날에는 이름이나 번호가 붙어 있는 자리에 앉아 앞에서 부장들과 관리자들이 하는 말을 듣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심지어 학생과 상담하는 중이라도 멈추고 회의실로 내려가야 했다. 물론 학생이 사고를 쳐서 뒷수습하는 것에는 예외 인정을 해주었지만 학생과 할 이야기가 있어 상담하느라 빠진다면 교감의 잔소리를 피할 수 없었다. 회의라고 해 봤자, 의견을 말할 수 없고 각 부서별 전달과 관리자들의 잔소리 아니면 자기 자랑이나 늘어놓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다인데도 그걸 빠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난리법석 피우는 관리자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그 앞에서 내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말을 듣는 나도 한심하기는 매 한가지였지만 말이다. 


지식 주입 중심의 수업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폭압이라고 표현한다면 쉽게 동의할 수 있는가? 아이들은 기초적인 지식이 필요하다는 입장부터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지식중심의 수업과 교육과정을 옹호하는 모든 주장은 학생을 능동적인 배움의 주체로 두지 않는다. 오로지 학생의 수동성만 강조할 뿐이다. 자신이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게 재미있다는 경험조차 별로 없는 학생들이 지식을 거부할까봐 시험과 진학을 통한 성공이라는 폭압성을 심어놓았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그걸 쉽게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학생을 능동적인 배움의 주체로 두지 않는 수동적인 교육이 바로 폭압이다.


배움이라는 것을 마치 절대적인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는 것이며 시험 성적은 그것을 입증하는 근거라는 생각은 좀처럼 시대의 변화와 흐름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는 경향성이 있다. 왜 그런가?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폭압을 경험해 왔고 저항을 해도 어느 순간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에 절망이 사람들의 마음 속을 지배하고 있다. 어떻게도 바뀌지 않는 폭압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그 생존방식은 경쟁과 비교라는 또다른 폭압적인 방식을 갖는다. 남과 비교하여 조금이라도 우위를 점하려는 강한 성향을 본능 속에 심어둔다. 그래서 교육을 바꾸려는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하고 그런 시도로 인해 내가 손해보는 것 아니냐며 불안의 극단을 보여준다. 


폭력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언제나 약자이다. 아이들은 약자에 속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이 있다. 그런 아이들이 생존을 위해 취하는 방법이 힘으로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온갖 욕설과 힘, 끝을 보여주는 반항 등으로 학교와 교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한다. 누구든 생존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 현실이 폭압의 가장 생생한 현장이고 그곳이 학교이며 교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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