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1-3
산을 오른다. 이마에선 땀이 흐르고 흘러내린 땀이 붕대를 적신다. 문득 입을 매고 있던 붕대가 답답해졌다. 손끝으로 붕대를 쓸어내린다. 축축하게 젖은 붕대가 거칠게 스친다. 이윽고 붕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월견을 답답하게 만들던 원인은 생각보다 힘없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입을 가득 메운다. 잘려나가 울퉁불퉁한 살덩어리가 꿈틀거린다. 끈적한 점액질이 흘러내리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시 한번 입으로 숨을 들이마신다. 코로 호흡을 할 때와는 다른 상쾌함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하늘이 어두워진다. 방금까지만 해도 북쪽 산의 하늘은 평소와 같은 맑은 바다와 같은 색이었다. 그런 하늘에 검은 연기가 차오른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집어삼키는 만큼 월견의 마음에 공포도 커져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식은땀이 이마를 적시기 시작하고 오한이 몸을 감싸 안았다. 발밑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월견은 금방이라도 죽음이 자신을 품을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항상 잿빛을 하고 있는 마을의 하늘과 같지만 다르다.
산이 조용하다. 새들도 지저귀지 않는다. 산 밑에서 검은 액체가 역류하듯 올라는 모습이 월견의 눈에 들어왔다. 나무뿌리에서도 토끼굴에서도 천천히 흘러나온다. 그 반투명한 검은 액체는 산을 집어삼키려는 듯 보였다. 숲에서 흘러나온 액체가 들판으로 향한다. 월견은 눈으로 액체를 좇았다. 액체가 흐르는 방향에 누군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월견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곧장 산을 뛰어내려 갔다. 붕대가 바람에 날아갔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시야가 좁아지지만 멈추지 않는다.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쓰지 않던 목에서 큰 소리가 나올 리가 만무하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실루엣이 뚜렷해진다. 긴 생머리를 한 소녀의 모습이 월견의 눈에 비친다. 고개를 돌려 검은 액체를 확인한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지만 월견이 한발 더 빠르다. 소녀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월견을 바라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소녀에게 손을 뻗었다. 마침내 그녀에게 닿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곧바로 몸을 돌려 달렸다. 소녀는 월견에게 이끌려 달렸고, 이윽고 검은 액체가 소녀가 있던 자리를 덮쳤다.
월견과 소녀가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검은 액체가 점차 느려졌다. 정상에 올라 자신의 몸을 돌려 소녀를 등 뒤로 숨겼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검은 액체가 땅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하늘을 막아서던 연기도 사라져 갔다. 하늘은 이내 다시 맑아졌다. 다리가 떨린다. 땅을 디디고 지탱할 힘은 진작에 전부 소모했다. 몸에 힘이 풀린다. 맑은 하늘이 보인다. 햇볕이 따뜻하다. 눈이 감겼지만 저항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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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한기가 돈다. 바람이 차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부드럽고 조심스럽다. 아마 그 소녀가 분명하다. 월견은 소녀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이미 흉한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소녀의 눈을 보기가 두려웠다.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월견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월견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월견이 소녀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소녀는 월견의 손을 지나쳐 자신의 손으로 월견의 고개를 돌렸다. 가깝다. 소녀가 월견의 입을 만진다. 눈이 마주쳤을 때 소녀가 감사를 표했다. 소녀의 말투가 어눌하다.
소녀를 피해 몸을 뒤로 빼고 일어났다. 아직 어지럽다. 그리고 심장이 뛴다. 소녀를 뒤로하고 산을 내려왔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심장이 뛰는 느낌이 멈추지 않는다. 월견의 머릿속에 가까이 다가온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새하얀 피부에 투박하게 생긴 아저씨와는 전혀 다른 느낌에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아저씨보다 까치가 더 괜찮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후엔 검은 액체가 머릿속에 스멀스멀 차올랐다. 손이 떨린다. 자신도 모르게 두려웠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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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에게 검은 액체에 관해 물었다. 그림을 건네받은 까치는 고민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생각이 많아 보인다. 하면 안 되는 질문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잉크를 쏟은 종이처럼 보이는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나 싶기도 하다. 까치가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에 그림을 태웠다. 종이가 재가 되어 공중을 떠다닌다. 하늘하늘 춤을 추는 불씨가 아름답다. 불씨 뒤로 까치의 입모양이 말을 할 수 없다고 속삭인다. 우리는 그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다. 북쪽 산에 사람이 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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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빛을 처음 보았을 때, 마냥 해맑은 모습에 부모님은 기쁨을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에서 은하수를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미리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름처럼 하늘의 은하수처럼 나의 세상은 조용했다. 유년기에 들어서고 부모님은 나에게서 이상함을 느꼈다고 한다.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부모님은 순간 겁을 먹었고 한다. 나의 아이가 남들과 조금은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나의 부모님은 강했다. 외면하고 멀리하는 대신 따뜻하게 안아주셨다. 그리고 말을 하는 법을 보여주셨다. 그들은 나에게 등을 보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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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의 생일을 맞이하고 며칠이 지난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날. 부모님은 이사를 결심했다고 한다. 다른 날들처럼 아침에 눈을 뜨고 세수를 했다. 어머니는 빵을 구워 크랜베리잼을 발라주었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침 일찍부터 일을 하러 간 모양이다. 크랜베리잼을 한 입 가득 베어 물며 창밖에 날아다니는 새들을 구경했다. 새들의 아침인사를 듣지 못해 아쉽다고 생각하던 참에 어머니가 노릇하게 구워진 식빵을 하나 더 놓아주셨다. 어머니를 바라보자 어머니가 말했다. 고작 눈으로 문장을 읽어야 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평소에 말하는 속도로 말해도 알아들을 정도는 됐다. 아버지가 식사를 놓고 가셨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서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눈이 마주치자 살짝 웃어 보였다. 집 안이 텅 비었고 이제 자유시간이다. 창고로 달려가 물뿌리개를 가져와 물을 담았다. 화단에 물을 주고 그 위에 생긴 무지개를 감상했다.
무지개 뒤로 미리내 또래의 아이들이 지나갔다. 즐거워 보인다. 같이 놀고 싶다는 생각에 미리내가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무리 중 한 명의 아이가 미리내를 보았다. 인사하는 미리내를 보고 다른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속삭였다. 아이들은 미리내에게 손짓했다. 자신의 또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적 없던 미리내는 기뻤다. 친구가 생긴다는 생각에 설레 아이들에게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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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미리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할 뿐 말을 걸거나 챙겨주지는 않았다. 약간의 소외감이 들기는 했지만 미리내는 아이들을 따라갔다. 마을을 벗어나 다리를 건넜다. 아이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마을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건물은 무너져 내린 건물에는 이끼와 담쟁이넝쿨이 자라 있었다. 조금 칙칙하긴 해도 색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그 위를 덮은 식물이 풍경을 더 싱그럽게 만들었다. 처음 보는 마을 밖의 풍경에 두렵기도 했지만 신기하기도 했다. 가끔가다 보이는 작은 도마뱀과 실잠자리가 몽환적으로 보였다.
아이들은 마을 깊숙이 위치한 폐가로 들어갔다. 천장이 무너져 하늘이 훤히 보였다. 아이들 중 하나가 미리내에게 다가왔다. 키가 자신과 비슷한 노란색의 머리를 한 아이였다.
- 아무것도 안 들린다며 우리가 답답해서 어떻게 같이 노냐?
노란 머리의 아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입모양을 읽은 미리내가 해맑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 말만 알아들을 수 있으면 상관없잖아?
아이들 무리 중 마스크를 쓴 소년이 말하며 미리내에게 스프레이를 던졌다. 메고 있던 가방에서 몇 개의 스프레이를 더 꺼내서 다른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벽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미리내도 따라서 벽에 스프레이를 분사했다. 벽이 알록달록해진다.
아이들과 노는 시간이 재밌다고 생각하던 찰나 아이들이 갑자기 도망쳤다. 아이들 중 한 명이 미리내를 보고 소리쳤다. 아이들을 따라 달리려고 하자 노란 머리의 아이가 미리내 앞에 멈추더니 밀어 넘어뜨리고는 다시 달렸다.
손이 따끔하다. 왼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건물 잔해 속에 유리조각이 섞여있었던 모양이다. 그림자가 미리내를 가렸다. 미리내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충혈된 눈이 반쯤 풀린 남자가 미리내의 눈에 들어왔다. 심한 악취가 난다. 악취 속에 은은하게 섞여 코를 찌르는 단내가 위산을 역류시켰다.
남자가 미리내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미리내는 몸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미리내는 눈을 감았다. 세상이 어둡고 조용하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움직이기엔 두려움이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피가 나는 손을 반대손으로 감싸 쥐었다. 쓰라리다. 갑자기 너무나도 조용한 세상이 미워졌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부모님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상은 여전히 조용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조용한 세상만 있을 뿐이다. 미리내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스프레이를 던져주었던 소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남자가 넘어져 있다. 소년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미리내의 눈을 가리고 일으켜 주었다. 미리내는 소년이 이끄는 길로 걸었다. 세상은 여전히 조용하고 어두웠지만, 따뜻했다.
소년은 미리내를 집에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미리내는 이름도 물어보지 못해 아쉬웠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소년은 여전히 뒷모습뿐이었다.
- 다신 애들이랑 어울리지 마.
가시 돋친 그의 눈빛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해가 졌다. 세상이 차갑게 식고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세상이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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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나의 유년기가 끝나기 전에 이사를 가기로 했다. 부모님은 한적한 들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유가 그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부모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알록달록한 마을과의 작별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아주 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웃집 아저씨의 눈웃음과 화단에서 항상 잠을 자고 있는 달맞이꽃, 하늘의 강렬한 태양. 언젠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겠지.
나에겐 친구가 두 명 있다. 표현은 서툴러도 항상 미소를 지어 보이는 듬직한 남자와 세상과 책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따뜻한 여자. 그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어디를 가더라도 행복하다. 그들을 위해서라면 마을은 가슴 한 편에 묻어 둘 수 있다.
이사한 집은 마을과 조금 떨어져 있다. 이 지역의 마을은 조금 이상하다. 잿빛이다. 하늘도 집도 사람들도 알록달록하지 않다. 부모님은 마을에 내려가지 말라고 말했다. 부모님을 속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바람을 쐐러 나갈 때면 마을의 반대편에 있는 길로 향했다. 고향이 있는 방향이다. 조금만 걸어가면 산이 하나 나왔다. 조금 작지만 숲이 있고 동물들이 살고 있다. 들판에는 화단에 있던 달맞이꽃이 한가득 피어있다. 다들 꿈을 꾸고 있지만 밤이 되면 하루를 시작할 테지.
하루는 문득 고향 생각이 났다. 부모님도 달맞이꽃을 보면 좋아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웅크려 달맞이꽃 한 송이를 꺾었다. 집에 있는 화분에 심어놓으면 분명 밤에 아름답게 피어나겠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꽃봉오리를 쓰다듬었다. 입꼬리가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주변시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인기척을 확인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 아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입모양을 보니 숨이 많이 차보였다. 아니면 소리를 지르고 있거나. 그 아이는 나에게 다가와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곤 뛰어온 방향으로 달렸다. 오른손으로 달맞이꽃을 조심히 쥐고 왼손을 잡아끄는 그 아이를 따라 달렸다. 숨이 차오른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표정이 너무 절박해 보인 탓일까. 정상에 다다르자 달려온 방향을 가로막았다. 그 아이의 어깨너머로 조용히 녹아내리는 검은 액체를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하늘이 어두워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늘이 말갛게 개고 검은 액체가 사라지자 그 아이가 쓰러졌다.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그런 소년의 머리를 들어 허벅지에 올렸다. 소년의 입 주변엔 흉터가 가득하다. 아팠겠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소년의 얼굴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았다. 그리고 소년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소년이 깨지 않도록 쓰다듬었다.
소년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입을 가린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지키려고 했을 때처럼 나에게 등을 보이고 있다. 측은함이 느껴졌다. 생각이 많아 보인다. 그 아이가 생각을 정리하도록 약간의 시간을 주었다. 그가 움직이지 않아 내가 자리를 옮겼다. 소년은 나를 마주하자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손으로 나의 시선을 가로막으며 가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손짓이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겁에 질린 강아지 같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상처를 만졌다. 놀라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그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그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그의 아름다운 고동색 눈동자로 나의 얼굴을 살폈다. 시선이 나의 입술에 다다랐을 때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한 번 더 소년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젠 어색하지 않다. 이름도 물어보지 못한 아쉬움에 소년을 불러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단지 그 자리에 앉아 소년이 사라진 방향의 하늘을 보았다. 잿빛의 달이 마을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