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들아. 찻잔 속에 무엇이 보이더냐.
아버지가 루빈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살짝 기울어진 찻잔 속에는 아버지가 내려준 차가 찰랑거릴 뿐이었다. 차가 담겨있습니다. 반짝이는 아버지의 눈을 보며 답하자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질문을 건넸다.
- 정녕 그 안에 차가 담겨있더냐.
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찻잔을 들여다보고 기울여본다 한들 아버지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루빈아. 훗날 담소화로 피어나고 지는 날이 다가오면 알 수 있을게다.
아버지는 담소화이시다. 동네 어르신들께 여쭤보면 담소화는 신의 지루함을 달래주는 일이라고 말해 주곤 했다. 허나 아버진 담소화에 관해 알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이름 또한.
동네에도 아버지의 이름을 알고 있는 이가 없다. 다만 담소화라고 칭하고 불리운다. 루빈 역시 주민이 담소화의 아들이나 꽃봉오리라고 부를 뿐 이름을 알지는 못했다. 이에 의문을 풀기도 했으나 아버지는 의미심장한 답만을 들려주실 것이 뻔했기에 그에 관해 묻는 것은 상상조차 단념해 버렸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약속이라는 장소를 찾아간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 하늘 아래 가장 밝은 빛줄기가 비추는 곳. 바람이 가장 고요하게 찾아와 휴식하는 곳. 담소화란 이름에 따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실은 그 누구도 아닌 태루 자신을 위해서 약속에 오른다.
푹신푹신한 땅 위에 무릎을 모아 공손히 기다린다. 두 개의 찻잔과 주전자. 모두 구름이 새겨진 채 영롱한 푸른빛에 공손함을 드러낸다.
태루가 찻잎을 꺼내 시간을 들여 천천히 그리고 기품 있게 공을 들인다. 따뜻하면서도 포근한 바람에 눈을 감았다 뜨면 그가 눈앞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음을.
- 오셨습니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차만을 들이켤 뿐이었다. 태루는 그의 태도가 익숙한 듯 허리를 살짝 돌려 등에 업힌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갓난아이를 그에게 보였다.
- 예쁘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품은 세상이 부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가 아이를 보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태루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웃고 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 태루의 뺨엔 어째서인지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의 눈물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지면으로부터 한 마디 정도의 거리를 두고 모여들었다. 태루의 마지막 눈물방울이 지면을 향했을 때 모였던 눈물이 서서히 그의 왼손에 모여들었다. 그것에는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동요하지 않았다. 서서히 형태가 변한 눈물 웅덩이에는 두 글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새길 루. 훌륭할 빈.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중 나온 아내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순수하게 사랑을 했음에. 고통을 이겨내어 아이를 낳아주었음에. 진정으로 아버지가 되게 해 주었음에. 수많은 감정이 그를 한순간에 어린아이로 만들었다. 아내는 그런 태루를 품어 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진정이 된 태루는 서재에 들어갔다. 아내조차 아들의 이름을 알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이름도 모르고 혼인해 준 아내에게 아이의 이름을 알려줄 수 없다니 미안할 따름이었다. 머릿속을 채워가는 고마움과 미안함을 뒤로하고 왼손으로 붓을 집어 들었다. 그다음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족보에 아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루빈은 다른 아이들처럼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다. 문예와 무예는 다른 아이들이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알고 그 열에서는 수십 개의 질문이 나왔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질문에 답을 내렸다. 손에 잡히는 족족 빠르게 몸에 익혀냈다. 루빈은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그에 따른 예의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그 나이 즈음이었을 적 태루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집안일을 어머니에게 맡기는 일이 없었고 아버지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전부 배워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정신과 육체를 단련했다.
[나무는 자신의 역사를 몸에 새기고 사람은 약속을 서사에 남긴다]
이듬해 루빈이 열여덟이 되어 성년식이 점차 눈앞으로 다가왔을 무렵 행간에 흉수에 관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흉수가 다녀간 마을엔 살아있는 이 하나 없다던데. 담소화는 잡아먹어 버린다나 봐. 하나같이 두려움에 떨며 흉수에 관해 수군대었다.
루빈은 점차 몸집을 불려 가는 두려움의 씨앗이 자신에게도 찾아왔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루빈의 발걸음을 태루에게 향하도록 만들었다. 허나 어째서인지 태루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자신의 앞에선 이 어린아이가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 수 있었다. 흉수가 두렵더냐? 루빈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작지만 분명하게.
-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는 법이란다. 운명의 실은 그리 단순하게 만들어지지 않아. 그 무엇보다 견고하고 부드럽지.
아버지의 태연함에 시간이 지나며 루빈은 평정심을 조금씩이나마 되찾아갔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성년식 아침이 밝았다. 이른 아침부터 태루는 마루에서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루빈이 준비를 마칠 동안 떠오른 태양에 물든 황금빛 하늘에 인사를 올렸다. 합장.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사. 이를테면 민들레처럼.
루빈은 아버지가 준 찻잔과 주전자를 지니고 걸음을 옮겼다. 가끔은 산짐승 소리를 따라 가끔은 바람에게 이끌려 약속에 발을 디뎠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양발과 무릎을 모아 살며시 땅에 내려놓았다. 눈을 감고 주전자를 들어 올려 옆에 흐르는 시냇물을 담아냈다. 반쯤 물이 담긴 주전자는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하지만 주전자 안쪽을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대신 흰 천으로 만들어진 주머니에서 찻잎을 몇 장 집어 들었다. 은은한 풀 내음 속 달콤한 향기가 루빈의 코를 간질인다. 이내 간질간질함은 두근거림으로 바뀌었으나 되려 차분함을 지키려는 의지에 사그라들었다.
찻잎을 넣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주전자 주둥아리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온도가 더 뜨거워질세라 재빠르게 그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가까이서 멀리 그리고 다시 멀리서 가까이.
살며시 뜬 눈앞에 그가 루빈과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내 앞에 있음을.
그의 몸은 가끔 빛을 받아 반짝이기도 했고 잔을 들어 차를 마시기도 했다. 태루의 앞에서 절대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노라며 자만하던 루빈이었다. 그렇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그의 뒤로 떨어지는 해가 보였다.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루빈은 그를 일다경조차 마주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하던 와중 눈물이 흘렀다. 루빈의 눈에서 나온 투명한 액체는 바닥을 향할수록 검게 물들었다.
톡. 지면에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그가 사라졌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림자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정신을 차려 서둘러 약속을 벗어났다.
약속을 향해가는 루빈의 뒷모습이 뿌듯하게만 느껴진다. 오랫동안 담소화라는 아름다움을 피워내던 나무는 일궈낸 모든 것을 떨구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차례가 왔다. 겨울의 나무는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을 곱씹는다. 더 많은 가지와 꽃, 열매를 틔우기 위하여.
태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로 향했다. 자신의 몸이 여느 때와 다르게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이 또한, 자신의 성장을 드러남을 알 수 있었다. 매일 보던 서재가 한 걸음 무겁게 다가왔다. 그간 담소화들의 세월이 남긴 흔적이 절대 가볍지 않았다. 그렇기에 태루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태루가 책상에 앉은 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문풍지에 아내의 실루엣이 드리웠다. 태루가 느낀 서늘함은 그것이 더는 아내가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럼에 그것에게 겸허히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함에 그것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송장을 내팽개치며 발을 들였다. 흉수로구나. 태루는 동요하지 않았다. 허리춤에 달린 검을 뽑아 들지도 않았다. 그러한 행동에 흉수는 더욱이 심기가 불편했다.
그들이 아뢰옵길 자신들이 금수임을 부정하는 이들은 본디 악하다 하니 그들은 자신을 품어 세상을 바로잡음에 돕는다 약조하였다. 눈앞에 이 수컷은 그들과 달랐다. 담소화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에게선 담소화의 향기가 짙지 않았다. 은은한 향기에 흉수는 하나뿐인 송곳니가 저림을 느꼈다. 네놈은 이미.
앞에 놓인 껍데기를 짓뭉갰다. 으스러진 살과 뼈에서 투명한 물이 흘렀다. 은은한 풀 내음과 달콤한 향기가 올라왔다. 그의 몸뚱이가 으스러지고 머리가 으깨져 형체를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흉수는 그의 미소가 훤히 보였다. 사라지지 않는 태루의 인자한 모습에 흉수는 거칠게 파고드는 소름을 피할 수 없었다. 견딜 수 없는 불쾌함에 그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자취를 감췄다.
[꽃을 틔운다는 것은 본연의 모습을 감춘다는 의미이기도 하단다]
짙은 남색 하늘 아래, 마을에서 누구 하나 견줄 이 하나 없는 처녀의 입술보다 짙은 붉음이 내려앉았다. 세상이 뒤집혀 사괘가 그것을 보지 못한 줄 알음에 백의 세상이 검게 불타고 있다. 이를 본 루빈은 제 몸 하나 가눌 수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와닿는다.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마을은 멀리서 봤던 광경보다 붉게 번뜩였다. 마을 입구에는 늑대 한 마리가 누워있었다. 산신 중 한 명인 아진이었다. 가쁜 숨을 헐떡이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 그가 루빈을 알아보고 헐떡였다.
- 어엿한 담소화가 되었구나... 약속을 읽어야 한다... 릉 아래 숨 쉬는 땅... 하얀 기둥...
말을 끝내 마치지 못한 그가 숨을 거두었다. 아진의 눈은 숨을 가둔 후에도 빛을 잃지 않았다.
대지는 아진에게 작별을 고하는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땅이 일렁이고 그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를 품어 볼록했던 땅은 점차 평지로 돌아갔다. 송곳니 하나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피로 물든 거리를 걷는다. 신발 밑창으로 느껴지는 끈적함에 소름이 돋지 아니할 수 없었다. 피가 튀어 오르게 하지 않기 위해 발목에 힘주어 걸음을 내디딘다.
마을을 가로지르고 나서야 산 중턱에 위치한 집이 루빈의 눈에 들어왔다. 좁은 비탈길로 이어진 산속은 마을과 달리 깨끗했다. 단지 평소보다 약간 고요했다.
어머니가 마당에 축 늘어져 있다. 흉수가 다녀갔구나. 외형은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알아볼 수 없었다. 차갑고 끈적한 피부. 피로 뒤엉킨 머리카락과 반쯤 벗겨진 두피. 그럼에도 속에 품고 있던 목도리. 털가죽에 털실을 꿰매어 만든 목도리는 피에 젖어 붉은빛을 띄우고 있었다. 중간중간 흰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흰 목도리였음이 분명했다.
사후경직이 진행되고 있던 터라 손아귀에서 빼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눌어붙은 핏덩어리도 가세했다. 마당 가장자리에 위치한 연못에 목도리를 씻어냈다. 조심히 정성스럽게 그리곤 목에 둘렀다. 물을 가득 머금은 목도리가 루빈의 옷을 적셨다. 미쳐 씻겨지지 않은 핏물 또한 탐욕스럽게 흘러내려가며 물들었다.
붉은빛을 뽐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루빈은 연못에 비친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핏물을 뒤집어쓴 채 분노가 가득한 눈동자. 허리춤에 달린 거대한 송곳니. 목도리에서 올라오는 달콤한 피 냄새는 그러한 모습을 더욱 부각시켰다. 자신의 모습에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지만, 다시금 들여다본 연못에서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집으로 들어가 평소와 달리 살짝 열린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는 아버지의 껍데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사실 원래부터 없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루빈의 앞에 놓인 껍데기는 비어있는 인형 같았다. 아버지는 죽지 않았구나. 한 편으로는 안심했다.
이윽고, 루빈은 부모님의 육신을 품에 안아 마당 한 편에 고이 묻었다. 나란히 놓인 그들의 무덤에 인사를 마쳤다. 감정조절을 익히 깨우친 루빈이었지만 거두어들이기로 했다. 부모 잃은 아이의 눈물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이러한 결과가 아니면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인가. 그가 원망스러웠다.
눈물 뒤로 주전자와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가업에 관한 의구심이 떨어졌다. 악한 금수 하나 막아주지 않소. 허나 어찌 아버진 그의 무료함을 달래었나이까.
루빈이 잔을 집어 들었다. 던져 깨부술 심상이었다. 팔을 높이 치켜들었으나 떠오르는 부친의 마지막 모습에 행할 수는 없었다. 잔과 주전자를 품에 안고 목 놓아 울었다. 루빈의 울부짖음과 눈물이 담긴 가보는 금세 녹아내려 그에게 스며들었다.
자정이 살짝 넘은 시간 고요한 밤이 스산함을 안겨준다. 마루 기둥에 기대어 앉아있던 루빈은 누군가 자신을 찾아왔음을 느꼈다. 서재에서 찾은 활을 움켜쥐고 등에 화살통을 둘러맸다.
흉수는 루빈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챘음을 알고 모습을 드러냈다. 흉수의 모습을 본 루빈은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연못에 비친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흉수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다가옴에 루빈은 숲으로 몸을 던졌다.
한 끗 차이로 루빈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흉수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흉수의 개들은 여전히 루빈을 추격했고 날아오는 화살 세례와 급습에 당할 수는 없었다.
루빈은 머릿속에 떠오른 장소를 향해 달렸다. 약속에선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진의 말도 흉수에게 대응하는 것도.
약속에 다다르자 바람이 점점 거세게 등을 떠밀었다. 그 덕에 흉수도 그의 개들도 루빈을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절벽 아래로 떠밀려 가는 것도 역시 막을 수 없었다. 떨어지는 순간 루빈의 눈에 하늘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새하얀 나비 두 마리가 스쳐 지나갔다.
루빈을 밀어낸 바람은 루빈의 몸을 한껏 높이 날려 보냈다. 루빈은 자신이 어디로 추락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곤두박질친 땅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마치 수면과도 같아 물결이 만들어지듯 일렁였다. 은은한 오색 빛의 일렁임은 충격을 흡수해 다치기는커녕 아픔조차 삼켜버렸다.
몸을 일으킨 루빈은 자신의 앞에 우뚝 솟은 하얀 기둥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기둥은 신비로운 오색 파동을 일으켰고 루빈을 자신에게로 이끌었다. 루빈은 기둥에 다가가 손을 올렸다. 손끝을 따라 기둥에 오색 빛의 파동이 그림을 그렸고 기둥은 큐브가 맞춰지듯 부분 부분 돌아가기 시작했다. 기둥은 이내 꽃의 형태를 이루었고
새하얀 꽃잎을 한 올 한 올 피워 속에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검은 꽃봉오리를 드러냈다.
루빈은 눈물을 흘렸다. 밝은 빛이던 그도 칠흑 같은 어둠이던 흉수도 한없이 아름답게 피어오르던 담소화도 자신임을 알았다.
루빈은 눈을 감았다. 허리춤에 있던 송곳니를 꺼내어 흉격을 갈라내었다. 손과 복부를 타고 흐르는 따뜻한 물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심장을 꺼내 들었다. 손끝으로 박동이 느껴진다. 오른손에 들린 송곳니를 놓고 따뜻하게 새빨간 열매를 양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리곤 천천히 네 개의 검은 꽃잎 속 푸른빛이 일렁이는 물속에 흘려 넣었다.
[약속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길이다. 나무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각자의 약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후 약속엔 그도 흉수도 담소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새하얀 나비 세 마리가 하늘을 헤엄치고 있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