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1-4
아저씨가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집에 발을 들였다. 서랍을 열었다. 끝부분을 잘라놓은 시가와 그 외에 몇 개, 그리고 서류. 그 위에 올려진 월견을 그린 스케치. 시가로 향하던 손이 멈췄다. 대신 성냥갑을 꺼내 의자 앞 테이블에 놓인 초에 불을 붙였다. 방이 환해졌다. 몸이 따뜻해진다. 실제로는 아닐지 모른다. 다만, 아저씨는 몸에서 추위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눈이 감긴다. 많이 피곤했던가. 혹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가. 기억이 흐릿하다. 비틀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플리스 소재의 원단이 유독 부드럽게 느껴진다.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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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로 느껴지는 따뜻함에 눈을 떴다. 창문으로 노란빛이 들어온다. 의자에서 일어나 현관을 열었다. 바다가 빛을 받아 노랗게 반짝이고 있다. 집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다. 평화롭구나. 바다가 움직인다. 서로를 밀어주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며 부딪치기도 한다. 그 소리는 참으로 시원하다.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까치가 계단을 내려온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하고 옆자리에 앉는다.
- 아저씨. 참 비루했어. 그래도 나름 재밌었는데.
까치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입은 웃고 눈은 울었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작고 고운 손이 눈물을 닦았다. 월견의 손이다. 고개를 들어 월견의 얼굴을 보았다. 붕대가 감겨 눈밖에 보이지 않는 얼굴에 더욱이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 미안하다.
거친 손으로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맑은 눈이 괜찮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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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에 쪽지가 놓여 있다.
“곤히 자길래 깨우진 않을게. 일어나면 확인해 봐.”
쪽지 밑에는 의뢰서가 놓여 있었다. 봉투는 촛농으로 봉합되어 가볍게 힘을 주니 바스러졌다. 봉투에는 글씨가 적힌 자작나무 껍질이 들어 있었다. 자작나무 껍질에는 목욕탕이라고 적혀있었다. 붉은 글씨. 도깨비의 의뢰다. 여느 때처럼 이빨을 품고 집을 나섰다. 사람과 같은 모습이라도 도깨비는 총으로 죽일 수 없다. 귀신의 한자를 쓰지만 영이 아니라 그를 닮은 무엇인가. 혼이 담긴 물건이라 물어 죽여야만 한다. 도깨비의 의뢰는 무엇을 마주할지 예상할 수 없다. 거절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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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흐릿하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까치의 얼굴이 보인다. 빈 주사기를 든 까치가 웃으며 말했다.
- 잘 잤어?
테이블 위에 놓인 실과 바늘. 피에 물든 거즈.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촛불. 까치가 묻는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웃고 있음에도 걱정이 희끗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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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외곽을 벗어나면 나오는 도깨비시장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향하면 작은 목욕탕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검은 목재로 지어진 목욕탕 외관의 반은 이끼가 자라 있다. 떡갈나무가 우거진 숲이라 위치를 모르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이지만, 내기도 아닌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은 꽤나 초조한 상황이라는 말인지라 장난을 당할 일은 없다. 목욕탕 앞에 켜진 푸른 호롱불이 떡갈나무 사이에서 작게나마 길을 안내했다.
바닥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호롱불에 태우고 문에 달린 작은 홈을 잡고 옆으로 밀었다.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 습기를 토해냈다. 수증기에 섞인 누린내를 따라 걸었다. 탕은 어두웠다. 탕에서 누군가의 손짓이 느껴져 탕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 예의는 지켜주시게.
신발을 벗고 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탕으로 들어간다. 탕의 물이 끈적인다. 무릎이 겨우 잠기지만, 쉽게 나가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무릎을 꿇어앉아 몸을 감춘 도깨비에게 의뢰 내용을 물었다. 도깨비가 조용히 뒷문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은 유독 어두웠다.
칼을 집어 들고 뒷문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이는 나무판자가 귀에 날카롭게 꽂혔다. 뒷문 너머로 가시덩굴이 길을 빽빽하게 막고 있었다. 가시덩굴 사이에 아이의 뒷모습이 보인다. 익숙하다. 조금은 다르다. 이질감이 든다. 가시덩굴을 잘라내며 아이에게 향했다. 가시가 살가죽을 찢는다. 피가 팔과 다리, 몸통을 타고 흐른다. 따뜻하고 끈적하다. 탕에 몸을 담근 느낌이다. 숨이 가쁘다. 아이에게 가까워질수록 가시가 날카로워진다.
월견의 뒷모습이 보인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월견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다만, 그 아이의 뒷모습에 마음이 진정되질 않는다. 마침내 아이에게 다다랐다. 아이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확인한다. 무엇을 봤다고 확신할 수 없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 아이의 가슴에 칼날이 파고들었다. 언제였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아이가 녹아내린다. 검붉은 액체가 되어 팔을 적신다. 이제 손에는 붉은 피를 뒤집어쓴 양귀비 한 송이뿐이다. 붉게 물든 꽃잎 사이로 흰색이 보인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따뜻하다. 눈을 떠보니 검은 목재의 천장이 보인다. 머리만 물 위로 올라온 채 누워있었다. 열린 뒷문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길로 탕 속에서 나와 신발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떡갈나무가 길을 안내했다. 순순히 보내주었다는 소리다. 의뢰는 끝이 났다. 무엇을 죽였는지 무엇을 해결했는지 모른다. 의뢰인의 마음에는 든 모양이다. 어깨너머로 푸른 호롱불이 강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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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놀음이다.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고 아무도 알 수 없다. 월견을 불렀다.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내릴 뿐 퍼져나가지 않았다. 까치에게 월견의 행방을 물었다. 까치가 월견을 불렀다. 월견이 방에서 나왔다. 고동색 눈동자가 아저씨를 향했다. 그의 동공이 커졌다. 놀란 모양이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내뱉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까치의 실루엣이 분주해 보인다. 졸음이 쏟아진다. 잠시 잠을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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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사흘동안 잠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사흘 하고도 반나절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눈을 떴다. 까치는 밤낮으로 아저씨 곁을 지켰다. 끼니에 맞추어 주사기로 용액을 주입하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한 곳에 머무르기를 좋아하지 않는 까치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알 수 있었다. 어떤 일이 닥쳐도 웃음을 잃지 않던 까치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런 그의 옆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까치는 아저씨를 보았고 월견은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는 촛불을 보았다. 가끔 바람에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저씨는 까치와 월견을 안아주었다. 월견은 처음으로 까치가 흘리는 눈물을 보았다. 아저씨의 품에서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살아온 평생의 시간을 흘려보내는 느낌이 들었다. 아저씨는 슬퍼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월견이 알 도리는 없었다. 어렴풋이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비루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는 있었다. 그래서 아저씨와 까치를 안아주었다. 월견의 부드러운 손이 그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표현할 수 없다.
세상에 아픔을 느끼는 개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태어나자마자 혀가 잘려버린 월견도. 부모의 시체 사이에서 자라난 까치도.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만 했던 아저씨도. 다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 대단한 존재는 아니다. 당장에 죽어도 서로밖에 모를 심오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타인을 위해 살고 있지만, 그들은 아저씨나 까치를 모른다.
- 의뢰인은 우리를 몰라. 그래도 의뢰를 한 사람들은 잠깐이나마 고마울 거야. 그들도 우리처럼 서로를 위해 살고 있을 테니까. 아저씨가 너를 위해 살고. 내가 아저씨를 위해 사는 것처럼. 그래서 의뢰를 하는 거지. 누군가를 지옥에서 꺼내고 싶어도 스스로 도울 수 없으니까.
타인을 돋는 이유를 묻자 까치가 했던 대답이다. 월견은 자신을 품고 있는 두 사람을 지옥에서 꺼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시작은 두 사람을 안아주는 것이다. 한동안 월견은 작은 몸으로 그 둘을 품었다. 어두웠던 세상이 점차 밝아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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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며칠 동안 소파에 몸을 맡겼다. 까치는 여전히 일을 나섰다. 까치가 일을 다시 나간 첫날. 까치는 몸에 멍이 가득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웃음기 가득한 그의 얼굴에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쾌활하게 웃고 복스럽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잠을 청한 후에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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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를 전달한 패거리를 찾아갔다. 붉은 목재 건물에 ‘Koffie’라는 간판이 달린 가게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의뢰받으러 가는 시간이 아니라 손님이 가득했다. 패거리 중 한 명이 까치에게 다가가 자신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가리켰다.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자작나무 껍질을 보여줬다. 까치에게 다가간 남자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들의 무리를 한 번 바라보더니 까치에게 따라오라며 고개를 까딱였다.
까치는 그들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처음은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가 까치를 걷어찼다. 까치는 앞으로 달려들어. 정면에 있던 남자를 때려눕혔고, 그들은 남자를 때리는 까치를 때렸다. 1층에서는 여전히 DnB가 흘러나왔고 서로를 향한 주먹은 패거리가 모두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여섯이나 되는 패거리가 전부 쓰러진 모습을 확인하고 주머니에 넣어뒀던 자작나무 껍질을 꺼내 그들에게 가볍게 던졌다. 몸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만신창이였지만, 그런 몸을 끌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