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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군 Apr 01. 2021

진급에서 또 떨어졌다. 3

걷다가 지쳐서 결국 고민 끝에 집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평소에는 스타필드에 올 때마다 삼송빵집에 들러서 딸과 내가 좋아하는 통옥수수빵을 사겠지만 지금은 그럴 힘이 없다. 더구나 장모님께 말할 때 회사 외근이 일찍 끝나서 집에 왔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되지 않는다. 장모님은 내 안색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는지 아파서 일찍 온 게 아닌지 걱정하셨다. 양가 부모님들께는 지난해부터 코로나로 회사가 어려워 진급이 유예되었으니 계속 그런 것으로 말씀드리면 될 것 같다.


7살 딸은 아빠의 기분은 감지하지 못했는지 놀아달라며 장난을 친다. 내가 7살일 때 나의 아버지는 어떤 기분으로 회사생활을 하고 계셨을까? 아버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시절 일본으로 가서 사업을 일구려 하셨다.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사업이 어느 정도 정착된 후에 할머니와 아버지를 데리러 오셨지만, 할머니는 일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한국에 남기를 선택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총명하여 공부를 잘했고, 서울에서 상대를 나와 은행에 취업하셨다. 그 당시 교수님은 아버지에게 학교에 남기를 권했지만 아버지는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은행을 택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은행 생활을 하셨고 같은 직장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어머니를 소개받아 결혼을 하셨다.


어머니는 지금도 미인이지만,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왜 나는 어머니의 외모 유전자를 충분히 받지 못했을까 아쉬움이 든다. 그런 미모로 콧대 높은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은 계기를 종종 말씀하신다. ‘너희 아빠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서 더 만나지 말자 하려고 했었어. 어느 날 데이트 식사자리에서 아빠가 코를 훔치며 삼계탕을 먹으면서도 “어머님 가져다 드리면 참 좋을 텐데”하시는 말씀을 듣고, 애잔한 마음에 계속 만나다 결혼했네’라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동으로 자란 아버지는 외로움이 싫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둔 대 가족을 꾸리셨다.


어머니는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셨고, 아버지 혼자서 할머니를 포함한 6명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아버지는 총명함으로 동기 중에 가장 빨리 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임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정치력은 없으셨다. 임원이 되려면 당시 회장에게 돈뭉치를 건네는 게 관례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못하셨고 생각보다는 조금 일찍 퇴직을 하셨다.


아버지의 ‘정치력 없음’ 유전자가 내게도 심어진 것을 보셨을 텐데 아버지는 왜 내게 취직을 권유하셨을까? 물론 나는 그 당시 아버지가 느꼈을 무게보다 가벼운 어깨의 짐을 지고 있다. 아이도 하나고 아내도 나보다 안정적인 직업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급 탈락의 충격이 완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친 몸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자다 깨다를 반복 하며 탈락의 원인과 앞으로의 계획을 반추해다. 새벽 6시가 되었다. 얼마 전부터 회사 근처에 헬스장을 등록해서 매일 운동한 지가 두 달 정도 되었다. 성실함의 표본인 나로서는 운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출근을 하고 싶었지만 몸과 마음이 거부했다. 팀장에게 이번 주는 휴가를 쓰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오전에는 회사 선배들이나 동기들에게 연락을 해보며 앞으로의 거취를 고민해본다. 그들도 ‘버티기’ 외에 뾰족한 수를 내놓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 딸이 유치원에서 돌아왔다. 벚꽃이 완연하고 오랜만에 미세먼지가 없어 딸과 함께 공원에 갔다. 햇살은 눈부시고 벚꽃은 몽환적으로 가득 피어 있었다. 딸은 이 꽃, 저 꽃을 따달라고 한다. 딸과 함께 잡기 놀이도 하고 목마를 태우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도, ‘아 진급만 되었으면 정말 완벽한 순간인데’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다가 ‘내가 정말 감사함을 모르고 살고 있고, 나의 아쉬운 부분에 집착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렇게 예쁜 딸과 아름다운 벚꽃을 즐기며,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며 가지지 못한 것을 쫓기만 했지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과 행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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