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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아침, 시어머니를 두고 가출했다.

나쁜 며느리가 되기로 마음먹다.

설 명절을 며칠 앞둔 어느 아침 어머님께서 연락이 오셨다. 울고 계셨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당장 시댁에 와줄 수 있냐 물어보셨지만 내가 간다 해도 딱히 뾰족한 방도는 없었다, 그러나 이른 새벽부터 집 밖을 배회하고 계신 어머님을 외면할 수 없었기에 나는 짐을 챙겨 우리집으로 오시라고 했다.    

  

급하게 집을 쓸고 닦았다. 지난밤 마음고생을 하셨을 어머님을 위해 방을 꾸몄다. 오래 비워 냉기가 흐르는 작은 방에 불을 지피고 새로 빤 이불을 깔아 온기를 채웠다. 며칠 전 공연에서 받은 꽃다발을 꽃병에 꽂고 여러 개의 화분을 놓았다, 이곳에서는 어머님이 안정감을 느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집에 오신 어머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가끔은 슬퍼 눈물이 났고 순간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남편도 없는 이 집에서 단둘이 잘 지낼 수 있을까? 그렇게 기약 없는 고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평화로운 일상이 흘러갔다. 함께 드라마를 보고, 밥을 먹고, 담소를 나누다 보면 하루가 끝이 났다. 며칠 새 집안 풍경이 하나둘씩 변하고 묘하게 냄새가 바뀌었다.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도 혼자 계실 어머님 생각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생겨났다.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매번 시댁에서 맞이하던 명절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형님네 식구들이 우리집으로 오겠다고 했다. 나는 어머님께 당분간 형님을 보고 싶지 않다고, 친정에 가 있을 테니 원하시면 이 집에서 편히 만나시라고 했다.


갑작스런 나의 말에 어머님은 깜짝 놀라시며 무슨 일이냐 물으셨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 이런저런 핑계들을 떠올리며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이 떠난 지 1달 즈음 됐을 무렵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이전에도 남편의 소식을 묻거나 나를 걱정하는 몇몇 이들의 연락을 받아왔던 터라 으레 걸려온 안부전화려니 했다. 그러나 형님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주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가까운 친척어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며 마지막 면회를 하고 돌아와 마음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그분과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하며 감상에 젖어들었다.

한참 그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건네던 중 그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니 네 생각이 났다고. 나는 신혼여행에서 남편과 함께 당했던 교통사고 때문이려니 했다. 그러나 그 뒤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 너희 어머니도 교통사고 당해서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나? 죽기 전에 상태가 어떠셨어? 뇌사 아니면 식물인간? 그럼 어머님은 몇 살 때 돌아가셨어? 아 30대셨겠구나 "

마치 '점심은 먹었냐'와 같은 대화를 주고받는 듯 가벼운 어투로 던지는 그녀의 질문들에 나는 돌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러나 나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한 그녀는 계속해서 혼잣말들을 쏟아내었다.
 
" 우리 삼촌보다 딱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좀 위안이 되더라고. 삼촌은 나이도 많으시고, 자식들도 다 키워놨고, 돈도 많이 벌어놔서 걱정 없거든. 너희 엄마보다는 우리 삼촌이 훨씬 낫잖아. 우리 마을에는 30대에 자살한 사람도 있는데 뭘"

그 뒤로 어떤 이야기들이 이어졌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혼자서 주절대던 그녀가 '아무튼 그럼 안녕' 하고 곧 전화를 끊었다는 것 말고는. 마치 길을 걷던 중 아주 세게 뺨을 얻어맞은 사람이 아무 대응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상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전화를 마쳤다.

그로부터 일주일을 호되게 앓았다.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그녀의 말들을 지울 수 없었고 때때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손이 떨렸다. 가만히 앉아 멍을 때리다가도,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도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에 눈물을 훔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나는 여러 날을 밤이 늦도록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사람으로부터 말로 상처받아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지만 차마 그 이야기를 다시 내 입에 담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마음에 새로 생긴 생채기를 끌어안고 그렇게 몇 달을 힘들어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쳐요. 내가 가진 빚이 1000만 원인데 누군가는 5000만 원 혹은 1억의 빚을 갖고 있다 치면 '아 그래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지'라고 위안삼을 수 있죠. 그렇지만 그 사람의 면전에 대고 '네가 내 상황보다 안 좋은 걸 보니 그게 참 위안이 된다'라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어머님...


지난 4년 동안 매번 저를 감정 쓰레기통처럼 사용하실 때도 그러려니 참고 넘겼어요. 그렇지만 형님이 대체 저를 뭐라고 생각하시길래 저한테 런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어요. 이건 저에게도 엄마에게도 엄청난 실례고 무례예요. 저희 엄마는 고작 형님 위안 삼으라고 그 나이에 그렇게 돌아가신 게 아니에요..."


나는 목소리를 떨어가며, 눈물을 꾹꾹 눌러 삼켜가며 더듬더듬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의 이야기를 한참 들으시던 어머님은 엉엉 우시며 당신이 대신 미안하다고 사과하셨다. 눈물이 잦아들기까지 한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어머님께 당분간 형님을 보지 않더라도 이해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내 마음이 나아질 때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셨다.




다음날 오후 오랜만에 남편으로부터 전화 걸려왔다.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남편에게 담담히 이곳의 상황을 전했다. 덧붙여 나는 설에 집을 나갈 것이고 그래서 이번 명절은 당신의 가족들과 함께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남편은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그럼에도 자신의 가족들을 지켜주어 고맙다고 했다.


부부 중심의 건강한 결혼생활이란 양가 부모님이고 나발이고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둘만 잘 살면 끝인 관계를 뜻하는 걸까? 아마 둘의 관계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상대방의 가족을 포함하여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들까지 함께 고려하는 것을, 그를 통해 부부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게 함께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조금 나쁜 며느리가 되었지만 좋은 아내의 자리는 지켰다 생각하 조금은 음이 편해졌다. 아주 잠시 모든 것을 속으로 삼키고 애써 방글 웃으며 형님네와 어머님 곁을 지켜야 했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내게 그렇게까지 노력할 인내심 따위는 없었다. 를 지키기 위해서 더는 참지 않기로 했다.


나는 정성을 들여 어머님께 명절 아침상을 챙겨드리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 설날 아침, 시어머니를 두고 가출하는 며느리치곤 발걸음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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