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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김영하의 '말하다'가 답했다

지금껏 세상 사람들이 살아야 한다는 방식에 맞춰 크게 어긋나지 않게 살아왔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수준에서, 적당하게 행동하면서 적당히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누군가가 기대하고 요구하는 방향대로 공부하고, 대학 가고, 일하고, 결혼하여 살다 보니 지금의 내가 되었다.


적당하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가끔 나 자신은 이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듯했다. 20대 초반에 한 번, 20대 후반에 또 한 번. 적당한 삶의 경로를 따라 걸어가다가도 문득 '이게 맞나'라는 생각에 멈춰 서곤 했다. 30대 중반이 된 최근에 나는 다시 멈춰 섰다. 그리고 다시 그 길 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던진 '너는 어떤 삶을 살고 싶냐'는 질문에 '자유로운 삶, 표현하는 삶, 나의 빛과 색을 마음껏 발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난 시간 동안 내가 가진 빛과 색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궁리하며 살아왔기에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간 알게 된 그 '모든 무엇'들을 마음껏 표현하며 살고 싶어졌다.


살고픈 삶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자마자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내 면전에 대고 '지금? 네가? 무엇으로? 어떻게? 정말?'이라고 날 선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과정을 통해 과연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쉽게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었다.

이제는 열심히 해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이 아니라 비관입니다. 비관적 현실주의, 즉 비관적으로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되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대책 없는 낙관을 버리고,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성급한 마음을 버리고, 냉정하고 비관적으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비관적 현실주의란 인상을 쓰고 침울하게 살아가자는 게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의 의미,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지금껏 '낙관적 이상주의자'로 살아온 내게 '비관적 현실주의자'가 되라는 김영하의 말은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글을 읽어 갈수록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삶에서 큰 고통을 마주했을 때 누군가가 건네는 '마음껏 울어. 이제 다 괜찮아질 거야'라는 대책 없는 위로보단 '괜히 힘 빼지 말고 조금만 울어. 앞으로도 힘들 테니까'라는 걱정스런 조언이 더 큰 힘이 되는 것과 같았다.


비관적 현실주의란 '다들 그렇게 산다'는 어쭙잖은 합리화나, '행복은 먹고살만한 사람들이나 찾는 배부른 꽃노래'라는 패배의식에 빠지는 것이 아니다. 오'행복을 이뤄가는 과정은 원래 쉽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생은 앞으로도 쉽지 않을 테니 지금부터라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살 테다'라고 다짐하는 것에 가깝지 않나 싶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남이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를 저는 건강한 개인주의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건강한 개인주의란 타인의 삶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독립적인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 안에서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때의 즐거움은 소비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이어야 합니다. 물건을 사면서 얻는 즐거움이 아니라 뭔가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즐거움, 즉 구매가 아니라 경험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많이 벌고 많이 쓰고 많이 저장하는 삶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에서 어떤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까를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김영하는 비관적 현실주의를 딛고 더 나은 현실로 나아가기 위해서 건강한 개인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나 스스로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모든 개인이 살 수 있다면, 그러한 개인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다면. 그것보다 더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는 없을 것 같았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내가 마음껏 추구할 수 있는 즐거움들 중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이 무엇일까?'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관계와 소통, 새로움과 성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좇아왔던 것들, 예를 들어 리학과 뮤지컬, 세계여행은 앞서 말한 4가지 단어를 충족시켜 주기에 선택한 경험들이었다.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해서 계속해서 뮤지컬 공연을 하고 세계여행을 떠날 수는 없었다.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공간 혹은 물질적 제약으로부터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했다. 책의 저자는 그중 하나로 책 읽기를 제안했고, 나는 거기에 덧붙여 글쓰기를 선택했다. 


책을 읽는 것이야말로 매번 새로운 세상 속에서 저자와 관계 맺는 경험이며,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나 자신과의 소통은 물론 스스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그 어떠한 제약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어느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마음껏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면서 건강한 개인주의를 확고하게 담보하려면 단단한 내면이 필수적입니다. 남에게 침범당하지 않는 단단한 내면은 지식만으로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하여 비로소 완성됩니다. 지식만 있고 자기 느낌은 없는 사람, 자기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개인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우리 사회에는 자기 스스로 느끼기보다는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느끼는가, 뭘,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자기만의 감각과 경험으로 충만한 개인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그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감각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깊게 느끼는 삶, 남과 다른 방식으로 자기만의 내면을 구축하는 삶, 이런 삶의 방식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잘 느낍시다. 그리하여 함부로 침범당하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고독한 개인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갑시다. 




책을 덮으면서 부족하게나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세상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기꺼이 내가 바라는 것들을 추구할 수 있는 삶, 내가 선택한 경험들을 통해 마음껏 느끼고, 생각하고, 그것들을 표현하는 삶. 삶의 방식에 대해 다수가 선택한 정답을 찾기보단 나만의 답안을 만들어 가는 삶이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모습이었다.


눈에 보이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그것들이 마치 자신인양 과시하는 사람보단, 누군가로부터 침범당하지 않고 결코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통해 내 가치를 확인받으려 애쓰기보단, 조금 고독하더라도 나 자신으로부터 충분한 존중과 인정을 받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두 가지 방법, 이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내가 보다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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