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달 전 더 글로리 시즌1을 본 뒤로 시즌2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리고 시즌2가 오픈하자마자 10편 가까이를 몰아서 봤다. 마지막 회가 끝난 뒤 진한 여운 속에 머물다가 문득 누구나 문동은처럼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나의 목적을 집요하게 좇아가다 보면 결국은 그곳에 도달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꿈이 된다는 건,
무언가를 갈망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지금껏 그래본 적이 있었던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Dream Note라는 이름의 수첩을 만든 적이 있다. 단순히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것을 적는 버킷리스트와는 달리 그곳엔 '되고 싶은 나'와 '살고 싶은 삶'에 관해 적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언젠가 갖고 싶은 역량과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삶의 모습에 대한 글이 주를 이뤘다.
얼마 전 봄맞이 대청소를 하며 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그 노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노트에 적었던 것들 중 많은 것들이 실제로 이뤄졌다는 것을 깨닫고 적잖이 놀랐다. 사람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닮아간다는 사실에 감탄하는 동시에 아직 미처 이루지 못한 것들 또한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겼다.
그 당시 '갖고 싶은 능력'이라는 타이틀 아래쪽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적혀있었다.
< 갖고 싶은 능력 >
외국어 소통력 - 영어로 일상적인 대화 및 관계 맺기
PPT 제작 및 프레젠테이션 능력 - 발표 및 강연
의사소통력 - 진솔한 대화, 상담, 설득, 회의, 토론
대인관계 관리능력 - 넓은 관계 및 소수와 깊은 관계
시간관리 및 스트레스 대처력
메타인지 - 생각 정리 및 구조화
콘텐츠 제작력 - 사진, 영상, 글
글쓰기 능력 - 리포트, 에세이, 극작
가창력 - 뮤지컬, 가요, CCM
나에 대한 이해 - 가치관, 능력, 성격 등 전반
기초 심리학적 지식 - 자기, 성격, 행복, 동기, 상담
차분하고 논리적인 언어구사 및 합리적 의사결정력
슬쩍 봐서는 막연한 듯 보였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기대했던 모습이 무엇인지 또렷이 알 수 있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가 원하는 방향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비록 '차분하고 논리적인 언어구사와 합리적인 의사결정 능력은 여전히 부족하군...'하고 웃었지만, 그 외에 갖고 싶었던 많은 능력들은 크던 작던 여러 방면에서 성장과 발전을 이뤄낸 상태였다.
갖고 싶은 능력에 관한 글 다음장에는 마치 나 자신에게 부탁 혹은 다짐을 하는 듯 '이런 사람이 되자'라는 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목록을 하나씩 차근히 읽어가면서 내가 단순히 돈이나 명예, 권력과 유명세 따위가 아닌 가치로운 삶의 모습과 방향을 쫓았다는 것이 자랑스러워졌다. 정말 이 모습 대로만 살 수 있다면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은 물론 나 스스로도 참 잘 산 인생이라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되고 싶은 모습 >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 & 보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생기 넘치는 사람.
꿈을 품고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 후회하지 않도록 용기 있게 도전하는 사람.
행복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고 직접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 & 그 행복을 나눌 줄 아는 사람.
늘 감사하고 반성하는 사람 &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
가진 것을 나누고 아낌없이 베풀 줄 아는 사람 & 누군가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
현명하고 매력적이고 당당한 여자 & 깊이 있고 진실되며 인간미 있는 사람.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을 가지되, 노력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가는 사람.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사람 & 순간과 감정에 충분히 머무를 수 있는 사람.
사람과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되,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동기를 부여하는 사람 &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
감사하게도 '과거의 나'가 꿈꿔왔던 '미래의 나'는 '지금 나'의 모습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었다. 한 구절씩 읽을 때마다 내가 꿈꾸는 모습에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아 안도가 되었고, 여전히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는 뿌듯함에 배시시 웃음이 났다.
잠시 후 공책을 덮으려다 맨 뒷장에서 반듯하게 접혀있는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나의 가치'라는 제목으로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나의 장점들이 적혀 있었다.
< 나의 가치 >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소소한 것에도 큰 행복과 감동을 느낀다.
생에 대한 의지와 자립심이 강하고 혼자서도 잘 해낸다.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진정성 있게 관계를 맺는다.
표현력이 좋아서 핵심을 찾고 쏙쏙 이해되게 설명한다.
공감을 잘해줘서 상대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게 한다.
강하고, 열정적이며, 참 대단하고, 가끔은 놀랍다.
꽤나 이쁘고 여성스러우며 사랑스럽고 귀엽기까지 하다.
섬세하게 감정을 읽고 사람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챙길 줄 안다.
사람들에게 기꺼이 먼저 다가갈 줄 알며 약자를 도울 줄 안다.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순발력이 뛰어나다.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견디고 극복해 내는 힘과 의지가 있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에 옮겨서 결국은 해내고 만다.
무언가로부터 통찰을 얻고 배울 줄 알며, 그것을 적용해 내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 당시의 나는 자존감이 낮고 열등감에 쩔어있던 쭈글이였기에, 하찮고 초라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을 이렇게 해서라도 북돋워주려 애썼다. 사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다 생각했기에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이라도 훗날의 내가 가지게 되길 애써 빌어주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그 당시 내가 바랐던 것들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덕에 나는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귀한 것들을 넘치도록 갖게 되었다.
나조차 몰랐던, 아니 지금껏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장점들을 마주하니 뭔지 모를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다. 더불어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구나, 아니 꽤나 근사하고 좋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과거의 나로부터 인정받는 기분이 들었다.
더불어 지금껏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지 못하고 부족함들만 들춰내며 좀 더 잘하고 나아지라 요구했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멋지고 괜찮으니 너무 몰아세우지 않기로, 더디지만 조금씩 계속 나아가고 있으니 계속해서 응원하며 힘을 보태주기로 나 스스로와 약속했다.
앞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좀 더 넓고 깊게 확장하고 싶다. 지금껏 미처 보지 못했던 삶의 측면으로 시야를 확장하여 더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하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에 대한 기대는 더 크게 품고 싶다. 꿈꾸고 바라고 선망하는 만큼 나는 변화되고 나아질 테니까. 10년 뒤 이 글을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을까. 생각만 해도 벅차고 설렌다.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 자신의 영혼을 무너뜨리고 인생을 처참히 망가뜨린 박연진을 꿈으로 삼는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모든 고통들을 되갚아주기 위해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박연진만 생각하며 복수를 꿈꾼다. 결국 문동은은 간절하게 갈망하던 복수의 꿈은 물론, 박연진에게 짓밟힌 어린 동은이가 가졌던 건축학도의 꿈마저 이뤄낸다.
만약 10대의 문동은이 그 꿈의 대상으로 박연진이 아닌 30대의 문동은을 삼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여전히 20년 간 고생하며 돈을 모으고 자신을 고통에 빠뜨린 인간들을 성장의 동기로 삼았었겠지만, 머릿속으로 그들에 대한 복수 대신 자신의 미래를 그리며 그 모든 에너지를 자기의 행복을 위해 쏟았다면. 아마 그 예쁜 웃음을 잃지 않고 조금 더 따뜻하게 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그랬다면 더글로리는 '역대급 사이다 복수극'이 아닌 흔해 빠진 '소녀의 성장분투기'가 됐을 테고, '내 꿈은 너야 연진아'라는 명대사는 '내 꿈은 너야 동은아'라는 신파풍의 다짐으로 전락해 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의 인생을 바쳐서 평생 '타인의 불행'을 꿈꿔온 동은이가 내 마음속에서라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못한다면 나라도 그녀의 꿈을 가슴에 품어주고 싶다.
내 꿈은 너야, 동은아.
나도 네가 그랬던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가며 꿈들을 이뤄내 볼게. 고생했어 정말. 그리고 살아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