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을 지날 때 즈음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미래의 내 남편이 어떤 모습일까.' 막연한 상상에서 시작된 생각들은 날이 갈수록 진지하고 깊어졌다. 결혼한 선배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남편을 찾을 수 있냐 물으니 원하는 남편상이 생각날 때마다 공책에 적어놓고 기도하라고 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적어 내려갔더니 리스트가 단숨에 10개를 채웠다. 이런 욕심쟁이 같으니.
그 뒤로도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언가를 깨닫게 될 때마다 틈틈이 그리고 바지런히 기록했다. 그렇게 적기 시작한 '내 남편의 조건'은 공책 2장을 채울 무렵 끝이 났다. 더 이상 적지 않았던 이유가 '그 공책이 어느 구석에 처박혀있는지 모르게 돼서'였던 것 같기도, '당시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와 이별을 하면서부터' 였던 거 같기도 한데, 정확한 이유가 기억나지 않는 것은 그 조건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기 때문이다.
짐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발굴한 여러 가지 고대 유물들 틈에서 이 공책을 발견한 나는 한참을 웃었다. 애초에 언니들이 의도했던 것은 '적당히 5~6개 정도로 절대 포기 못할 조건'들을 추려보라는 것이었을 텐데, 욕심 많고 야무졌던 나는 미주알고주알 바라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가며 무진장 애를 쓴 듯 보였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듯 귀여웠던 20대의 나는 정말 많은 부분에서, 아주 대단히 멋진 남자를 찾고 있었다.
[ 신앙적으로 결이 맞는 사람 ]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신앙이 성숙한 사람
나의 존재에 감사하고 나를 보내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
자기 전 함께 손 모아 기도하고, 손잡고 예배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
[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스스로를 아끼는 사람 ]
검소하고 사치하지 않으나 쓸 땐 쓸 줄 아는 사람
새벽 공기를 좋아하고 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깔끔하게 자신과 주변을 정돈하고 관리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려 노력하는 사람
활동적인 활동을 즐기며 자신의 건강을 챙길 줄 아는 사람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고 미래를 긍정할 수 있는 사람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고 자신과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볼 줄 알고 기꺼이 휴식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을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며 아내와 가정에 충실한 사람
현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소소하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
[ 마음이 따뜻한 사람 ]
약한 사람과 없는 사람에게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누고 베푸는 기쁨을 아는 사람
사람과 세상을 따뜻하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
모든 생명(동, 식물까지)을 소중히 여기고 아껴줄 수 있는 사람
[ 영혼으로 교감할 수 있는 사람 ]
서로의 존재를 그 자체로 존중해 줄 수 있는 사람
웃을 때 눈과 입이 함께 싱긋하여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
음악적 취향이 비슷하고 음악과 독서를 음미할 수 있는 사람
감수성이 풍부해서 삶의 순간들에 감동과 경이를 느낄 줄 아는 사람
눈빛이 맑고 생기 있으며,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통할 수 있는 사람
[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
강하고 믿음직스럽지만 힘이 들 때는 내게 기댈 수 있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뭔지 알고 나의 웃음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
내가 원할 때 나와 함께 있어주고 '따로 또 같이' 있을 수 있는 사람
예쁘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마음을 진솔히 표현할 줄 아는 사람
나의 감정과 생각, 일상을 궁금해하며 묻고, 듣고, 나눠줄 수 있는 사람
나의 나다움을(말 많고 덜렁대고 오버스럽고 우유부단함) 사랑해 주는 사람
[ 관계와 소통을 중요시하는 사람 ]
내게 소중한 사람과 잘 어울려 줄 수 있는 사람
자기 주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챙길 줄 아는 사람
자신의 부모와 가족은 물론, 나의 부모와 가족도 아껴줄 사람
서글서글하게 주변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는 넉살을 가진 사람
갈등이 생길 때 성숙하게 기도와 대화로 풀어나갈 수 있는 사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잘 표현하고 전달할 수 있는 소통력을 지닌 사람
자기 잘못을 시인할 줄 알며 기꺼이 용서를 구하거나 용서할 줄 아는 사람
[ 그 외 남자로서의 자잘한 조건들 ]
내가 만든 음식을 뭐든 맛있게 먹어줄 수 있는 사람
하루종일 카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나이가 들어도 나를 아끼고 여자로 느끼게 해 줄 사람
소소한 선물과 손 편지로 소박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사람
크고 작은 기념일들을 함께 챙기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
사진 속에 삶의 순간과 나를 아름답게 남겨줄 수 있는 사람
아무리 바빠도 틈을 내어 내게 연락 한통정도는 해주는 사람
때론 귀엽고, 때론 듬직하고, 가끔은 섹시하고, 남자다운 사람
아침에 눈을 떴을 때와 자기 전 눈을 감을 때 나를 떠올려줄 사람
말을 신중히 하고 고운 말을 쓰는 사람(장난스러운 비속어는 오케이)
50개가 넘는 리스트를 읽으면서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남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하는 건지, 설령 존재한다 할지라도 이 정도로 근사한 남자가 과연 나를 만나줄지 의구심이 들듯 말 듯 했다. 그러나 어느 새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조금씩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더니 눈이 게슴츠레해지며 천천히 고개가 끄덕여졌다. 마치 몹시 흡족한 작품을 갓 완성하여 눈앞에 둔 장인처럼, 내심 만족한 나머지 곧 콧구멍마저 벌름 댈 기세였다.
그 이유는 글에 적혀있는 완벽한 남편감이 현실에 실존할 뿐만 아니라, 자그마치 내 옆에서 나의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고 있는 자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자 역시 하나하나의 세세한 항목들을 모두 충족하진 못했지만, 그를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르고 닳도록 다듬은 결과 얼추 비스름하게나마 모습을 갖춰가고 있었다.
인간의 탈을 쓴 기계 내지 로봇과도 같던 남자, 내 이상형과는 아무 상관이 없던 그 낯선 남자는 12년이라는 시간을 나와 함께하면서 어마어마한 사랑꾼이자 모두가 탐내는 완벽한 남편이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완성된 나만의 마스터피스 덕분에 나는 마치 피그말리온이 된 듯 몹시 만족스럽다. 나의 완벽한 남편이여, 살아 움직여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