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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신혼여행만 세번째

남편의 휴가가 다가왔다. 휴가 전 일주일 간 아랍 명절이 끼어있다고 했다. 모두가 가족과 함께하는 명절에 남편을 그냥 두고싶지 않았다. 갈까말까 돈을 걱정하며 망설이는 내게 남편은 ‘앞으로 한동안은 오지 않을 기회라며 돈을 아끼기보단 함께 추억을 만들자’고 했다. 머잖아 집을 사고, 아이가 생기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면 남편과 내가 장기로 시간을 내어 함께 여행하기 쉽지 않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아랍행을 결정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한 것이었다. 한번이 무섭지 두번은 아무것도 아니랬던가. 아랍행이 결정되고나니 그간 참아왔던 여행욕이 스믈스믈 올라왔다. 곧이어 다가오는 나의 생일을 혼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생일을 핑계 삼아 스스로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기왕지사 근처(?)로 간 김에 터키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다. 나는 남편의 휴가 전 일주일 동안, 혼자 터키를 방문하는 일정을 추가했다. 3년 만에 가는 터키였다.



모로 가도 유럽만 가면 되는 거시여

남편은 2년 연속 좌절되었던 우리의 유럽 진출을 몹시 안타까워했다. 딱히 유럽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코앞에 두고 입구컷을 당하니 괜스레 오기가 생긴다고 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가고야 만다’ 이를 가는 남편에게 어느 나라든 좋으니 꼭 유럽이라는 곳에 들어가 보자고 했다.


여행지를 정하기 위해 지도를 펼쳐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서유럽의 나라들은 퍽 비쌀 듯싶었고, 이름조차 쉬이 읽을 수 없는 동유럽의 나라들은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적당히 익숙하면서도 적당히 즐길만한 나라가 어디 없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우리는 자연경관과 물놀이를 좋아하는 남편과 빵과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나의 욕구를 반영해 목적지를 이탈리아로 정했다.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나폴리. 이름만 들어도 낭만이 뿜어져 나오는 무수한 도시들을 보니 진짜 신혼여행을 가는건가 싶었다.

최신판이 2020년에 머물러 있다니 ㅠㅠ
어떻게든 돌아만 오면 되는 거시여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 편을 찾아보다 여행 전체를 취소할 뻔했다. 미친 듯이 올라버린 항공료 탓에 이미 편도티켓값으로 왕복 비행료만큼을 지불한 터였다. 장장 1시간 동안 스카이를 스캔한 끝에 나쁘지 않은 옵션을 찾아냈다. 아랍에서 인도와 태국을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표였다.


3개국을 다이렉트로 20시간 경유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중간에서 한번 정도 끊어온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태국은 내가 밥먹듯이 드나들던 내 영혼에 고향과도 같은 곳이 아니던가. 나는 남편과 함께하는 여행이 끝난 뒤 홀로 인도양을 건너 태국에서 며칠을 더 머물다 돌아오기로 했다.


원래 열흘로 계획했던 남편과의 여행은 어찌어찌 터키 일주일, 아랍 4일, 태국 5일이 추가되어 장장 한 달짜리 장기 여행이 되어버렸다. 아니 잠깐만 이게 맞아? 어허이 이거 참.. 하고 난색을 표하는 사이 입출국 항공편이 확정되었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있는지도 잊은 채 깊숙히 박아두었던 돈뭉치들


여행자, 여행가방, 외화 소환술

이전에 쓰고 남은 돈을 긁어모으려 여행용 지갑을 열었다. 그간 깊숙이 넣어둔 채 잊고 지냈던 지폐들을 꺼내어 새었다. 기념용으로 한 장씩 남겨뒀던 동남아 화폐들과 미처 다 쓰지 못하고 고스란히 들고 온 달러와 유로가 가득 있었다. 뭔지 모를 감정에 한참 종이돈을 만지작 댔다.


3년 만에 드레스룸에 처박혀있던 배낭을 다시 꺼냈다. 지퍼를 열자 배낭에 달겠다고 사두었던 국기 패치들이 쏟아졌다. 한 국가의 국기를 쓰다듬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들이 소록히 올라왔다. 이곳저곳 바지런히 돌아다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행자였던 내가 떠올랐다. 건강하고 생기가 넘쳤던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다시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머잖아 여행이 시작될 거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여행을 앞둔 설렘과 들뜸도 잠시, 또다시 여행을 망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불쑥 찾아왔다.


이거 언제 다 꼬매지...
망한 두 번의 여행, 그리고 성공할 마지막 여행

4년 전 세계일주로 떠난 신혼여행에서 사고를 당한 우리는, 이듬해 두 번째 신혼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코로나가 터졌고 또다시 여행에 실패하고 돌아왔다. 두 번 연이은 여행실패로 우리 부부는 많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회사까지 그만둬가며 오랜 시간 준비한 여행이었기에 그로 인한 좌절감은 더욱 컸다.


이번 여행에 내가 ‘마지막 신혼여행’이라는 타이틀을 붙이자 남편은 이제 신혼여행이라 부르기 무섭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나는 조만간 신혼이라 부를 수 조차 없게 될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고 말리라 비장하게 각오를 다졌다.


그러다 문득 여행에 성공과 실패가 어디 있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여행이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좋은 인연들을 만나고 나 자신을 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면, 이전의 망한 두 번의 여행조차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좋은 여행이었으니 말이다. 어떤 여행이든 괜찮다 생각하자 '반드시 성공해야 할 이번 여행에서 또다시 실패하면 어쩌나' 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누그러드는 것 같았다.




나는 이번 여행을 ‘반드시 성공해 내야만 하는 신혼여행 프로젝트’가 아닌 지난 4년 말도 못 하게 몸과 마음이 고생한 ‘우리에게 서로가 주는 선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여행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는 오로지 그 시간을 즐기고 행복한 것뿐, 그 어떠한 것도 이뤄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아직 이번 여행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는 인-아웃 비행기 티켓과 이탈리아 여행책 한 권이 전부지만. 이번 여행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 어떤 사람을 만날지, 남편과 얼마나 피 터지게 싸우고 몇 번을 울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마지막 신혼여행을 온몸으로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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