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우울증 약에 적응하기

매주 혹은 2주에 한번 병원을 찾아 약을 타온다.

그렇게 약봉지가 차곡히 쌓인 지 세 달이 지났다.

하루 2번, 약을 챙겨 먹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약이 가져다주는 결과들은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처음 먹었던 것은 파록세틴이라는 약물이었다.

약을 먹으면 모든 게 느려지며 속 잠이 왔다.

'우울증의 증상 하나겠거니'하고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모든 것이 약부작용이었.



하루에 14시간이 넘도록 내리 잠을 자니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밤낮이 뒤 바뀌어 이른 아침에서야 잠이 들었고

늦은 오후 눈을 뜨고서도 종일 비몽사몽했다.


혹시나 싶어 찾아본 약물의 부작용엔 무력감,

하품, 불면증, 졸림, 입마름이라 적혀 있었다.

턱이 아프도록 해대던 하품과 쏟아지던 졸음,

지난 몇 달간의 내 상태와 무섭도록 일치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 인지기능의 저하였다.

무얼 하려고 지금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아까 내가 상대에게 무슨 말을 했었는지,

불과 얼마 전 일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치매환자가 느끼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내가 내가 아닌 듯 낯설게 느껴졌고

정상과 이상을 수시로 오가는 내가 싫었다.


다음 진료 날에 병원을 찾아 증상을 말했다.

의사는 흔히 나타나는 약의 부작용이라며

다른 약으로 한번 바꾸어보자고 했다.

그렇게 겨우 2달간 적응해 온 약을 버리고

다시 브렌텔릭스라는 약으로 변경했다.



의사는 인지기능저하를 완화시켜 주고

과도한 수면에 도움 되는 약이라고 했다.

반신반의한 마음으로 약을 먹기 시작했다.


약을 먹고 나니 심장이 계속 두근거렸다.

잠이 오지 않아서 꼬박 이틀 밤을 새웠다.

피곤에 절어 잠이 들었던 복용 3일 차 밤,

온몸이 가려워서 긁다 잠에서 깨어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곧바로 검색을 했다.

부작용 중에 소양증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그렇게 며칠 밤을 피가 나도록 긁어댔다.


가려움증이 줄어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복병이 나타났다. 언어를 구사할 때도

먹고, 걷고, 몸을 움직이는 모든 행동에서도

눈에 띌 만큼 현저하게 둔마증상이 나타났다.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말을 한참 버벅대었다.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가 늘어졌다.

느릿느릿한 행동에 풀려버린 눈과 표정까지

거울 속에서 마주한 나는 한 마리 나무늘보 같았다.


이전에 느낀 것이 치매 노인의 심정이었다면

이제는 지적장애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약복용 초기의 '귀여운 동네바보'였던 나는

날이 갈수록 기괴할 만큼 느리고 멍청해져서

스스로 낯설다 못해 두마저 들었다.



감정도 조절되지 않았다. 누군가 모지리 같은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웃었던 어느 날에는 

비웃지 말라고 소리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혼자 가만히 집에서 멍하게 앉아있다가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통곡을 하기도 했다.

그렁그렁 차오르던 눈물은 오열로 변했고,

나는 무슨 감정인지도 모른 채 압도되었다.


불면과 무력감으로부터 나를 살리려니 

깨어서 보내는 일상과 인지력이 사라졌다.

일상을 되찾고 인지기능을 되살리려니

언어와 행동, 감정조절능력이 사라졌다.  


약으로 인해 잃어버린 나를 되찾으려면

다시 우울이라는 괴물에 나를 내어주어야 할까?

하나를 얻기 위해 다른 하나를 내어줘야 한다면

나는 무엇을 내어주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 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