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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잠을 자는 중입니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보름 만에 찾은 병원.

추석을 어떻게 보냈냐는 의사의 질문에

'열흘 동안 계속 잤어요 히~'라고 했더니

의사가 '어유~ 푸욱 주무셨네요'라고 웃었다.


명절을 맞아 얼굴을 보자는 여럿의 제안에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다며 거절했다.

거진 열흘을 집 밖으로 지 않고서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로 혼자 지냈다.


오후 늦도록 자니 밤늦게까지 깨어있게 됐

이른 아침에 잠들어서 저녁에서야 눈을 떴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평일인지 주말인지,

연휴가 시작됐는지 끝이 났는지도 몰다.


살면서 신생아 때를 제외하고 이렇게까지

많이 자본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잔 것 같.

잠이 나의 주 업무이자 하루의 목표인 것처럼

먹고 나서 자고, 앉아있다 자고, 깼다가 또 잤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느라 하루 1끼만 먹었다.

식욕이 없기도 했고 위장크기가 준 탓도 있다.

라면 1개를 끓여놓고 반도 못 먹고 남긴 날엔

나 자신에게 놀라서 혼자 우와하고 감탄했다.


침실에서 겨우 일어나 거실까지 나왔다가도

다시 소파에 누워 스르륵 잠이 들었다.

어쩌다 아침 일찍 눈이 떠지기도 했지만

씻고 외출복까지 입은 채로 또다시 잤다.


고양이처럼 하루 14시간씩 잠을 자는 동안

잠든 나의 곁에는 항상 고양이들이 있었다.

잠가루를 솔솔 뿌려대는 잠 요정 두 마리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온종일 자세만

바꾸어가며 잠든 주인과 함께 자고 또 잤다.


자다 깨어 몽롱할 때도, 잠들지 못하는 새벽녘에도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손을 더듬어 애들을 찾았다.

그렇게 따끈한 털무더기를 한참 쓰다듬다 보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아무 자극이 없는 환경에만 있다 보니

모든 감각적 자극의 역치가 낮아졌다.

사람 많은 곳에 소음을 견디기 힘들고

스치며 맡은 옅은 냄새도 선명히 느껴진다.


2명 이상의 사람은 동시에 만날 수 없고

사람이 많은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힌다.

매일 여러 개의 약속으로 가득 찼던 달력이

정신과 예약 일정 외에 텅텅 비어있다.


다행히 웃음의 역치도 덩달아 낮아졌다.

요상한 자세로 누워있는 고양이들이나

자다가 흘린 고양이의 침자국을 보고선

대단한 코미디를 본 것처럼 깔깔대고 웃었다.


이렇게 사소한 것에 이만큼 웃을 수 있다니

단순히 살면 행복의 역치가 낮아지겠구나 싶다.



1달 반, 집안에 틀어박혀 혼자 잠만 자는 동안

내가 믿어왔던 몇 가지 생각들이 바뀌었다.


세상에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은 없다는 것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것도 없다는 것.

세상은 지나치게 많은 자극들로 가득 차있고

자극이 없어질수록 감각이 더 살아난다는 것.

사람은 세상 그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 중 나보다 소중한 건 없단 것이다.


세상과 사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달라지고 있는 것 다.

이 모든 시간의 끝에서 무엇을 깨닫게 될까?

많이 궁금하고, 조금은 두렵고, 살짝 기대된다.


힘들었던 여름은 쏟아지는 비와 함께 지나갔고

세상모르게 자는 사이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내일은 찰나로 사라질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햇볕과 바람과 낙엽과 하늘을 만나러 집밖으로 야겠다.

이 침자국을 보다가 혼자서 깔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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