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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대접하는 법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걸려요.

기나긴 연휴를 앞두고 2주 치 약을 받으러 갔다.

그 작은 병원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독감과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절 찾았던

이비인후과가 딱 이런 모습이었는데...

아무래도 마음의 병이 크게 돌고 있나 보다.


아픈 사람들이 모인 공간은 어둡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유독 처지고 묵직한 공기로 가득 차 있다.

모두가 초점 잃은 탁한 눈으로 멍한 표정을 짓거나

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있다.


한 환자가 날짜를 착각하고 1시간을 기다렸댔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힘없이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오늘이 며칠인지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구인지

모든 것이 희미하고 멍한 그 마음이 그려졌다.



약을 먹은 이후로 모든 것이 느려졌다.

말, 행동, 생각까지. 느리게 걷고 먹고 말한다.

5분 컷이던 밥을 1시간 동안 먹다 알아챘다.

어쩐지 소화가 잘 되고 배가 잘 안 부르더라.


환절기를 귀신같이 알아챈 코가 비염에 걸렸다.

안 그래도 멍한 표정에 콧물까지 흘리고 있자니

훌쩍훌쩍 맹맹 거리는 동네 바보가 따로 없다.

손등으로 코밑을 훔치다 혼자 풋하고 웃었다.

멍청 열매를 주워 먹은 코찔찔이가 상상됐다.


하루에 반나절 이상을 자면서 보낸다.

밤 12시 즘 잠들어서 오후 12시 즘 눈을 뜬다.
느릿느릿 씻고 집을 치우면 2시가 금방이고

느릿느릿 마실을 다녀오면 금세 또 저녁이다.

뭐라도 좀 하고 싶은데 하루가 너무 짧다.



사람을 만나지 않은지 꽤 됐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력이 없다.

가끔 몸을 일으키거나 숨을 쉬기도 버겁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건 상상만으로도 피곤하다.


극 I인 친구가 바깥 활동을 길게 하거나

극 E를 만나면 기가 빨린다고 했었는데

그 느낌이 아마 이런 거겠구나 싶다.

항상 E로 살면서 사람들의 기를 빨아먹고

다녔던 내가 떠올라 살포시 미안해졌다.


최근 한 달 변해버린 내 모습에 익숙해져서

이전의 내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서핑이며 배드민턴이며 운동에 빠졌던 난

대체 무슨 힘으로 그 많은 일을 했을까 싶다.



며칠 전 오랜만에 날씨가 쨍하게 좋았다.

눈을 뜨고서 한참 창밖을 보며 앉아있었다.

랑당이 털이 포실포실 일어난 이불을 걷고

뽀송히 빨아둔 새 이부자리를 곱게 폈다.


목욕탕에 가서 몸을 풀었다. 따뜻한 물로

뭉친 근육을 풀고 구석구석 때도 밀었다.

오랜만에 거울을 보며 표정도 좀 지어주고

온몸에 정성껏 로션도 발라주었다.


집에 오는 길 마트에 들러 샤브 밀키트를 샀다.

큰 맘먹고 내게 저녁식사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야채와 버섯을 가득 넣고 장장 2시간에 걸쳐

건강한 한 끼를 만들어 먹였다.


부른 배를 끌어안고 집을 나서 산책길에 올랐다.

모두가 잠든 늦은 새벽, 개울가 옆을 걸었다.

귀뚜라미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밤

나와 오붓이 보낸 시간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하루를 돌이켜보니 참 살뜰히 잘 보낸 듯싶다.

나에게 대접받은 이 기분이 낯설지만 나쁘지 않다.

마음의 아픔을 돌보기 위해 분투했던 지난 한 달,

유일하게 좋았던 건 나에게 너그러운 나였다.

 

쉬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고

조급함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

내게 늘 밝은 빛만을 요구했던 내가

비로소 나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느낌이다.


심리학 책을 읽다 어느 문장에 한참을 머물렀다.

"나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나만 빼고."

"타인에게 하는 Yes는 나에게 하는 No와 같다."

지금껏 해본 적 없던 Yes를 이제야 내게 해주나 보다.



고작 하루, 나를 대접해 주고서 몸살이 났다.

3일 밤낮을 내리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마음처럼 살아지지 않는 내가 답답하고

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하나 막막하지만

이전처럼 나를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다.


어느 날은 좋고, 어느 날은 퍽 나쁘고.

어떤 때는 웃다가, 어떤 때는 펑펑 운다.

오락가락하는 상태와 감정이 파도처럼

나를 쳐대지만 그럼에도 버텨야 한다.


부디 내일은 좋은 날이기를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날이기를

내일은 파도가 좀 잦아들고 잠잠해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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