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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방랑전문 상담사 덕규언니
Sep 28. 2023
나를 대접하는 법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걸려요.
기나긴 연휴를 앞두고 2주 치 약을 받으러 갔다.
그 작은 병원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독감과 코로나가 유행하던 시절 찾았던
이비인후과가 딱 이런 모습이었는데...
아무래도 마음의 병이 크게 돌고 있나 보다.
아픈 사람들이 모인 공간은 어둡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유독 처지고 묵직한 공기로 가득 차 있다.
모두가 초점 잃은 탁한 눈으로 멍한 표정을 짓거나
몸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있다.
한 환자가 날짜를 착각하고 1시간을 기다렸댔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힘없이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오늘이 며칠인지 여기가 어디고 내가 누구인지
모든 것이 희미하고 멍한 그 마음이 그려졌다.
약을 먹은 이후로 모든 것이 느려졌다.
말, 행동, 생각까지. 느리게 걷고 먹고 말한다.
5분 컷이던 밥을 1시간 동안 먹다 알아챘다.
어쩐지 소화가 잘 되고 배가 잘 안 부르더라.
환절기를 귀신같이 알아챈 코가 비염에 걸렸다.
안 그래도 멍한 표정에 콧물까지 흘리고 있자니
훌쩍훌쩍 맹맹 거리는 동네 바보가 따로 없다.
손등으로 코밑을 훔치다 혼자 풋하고 웃었다.
멍청 열매를 주워 먹은 코찔찔이가 상상됐다.
하루에 반나절 이상을 자면서 보낸다.
밤 12시 즘 잠들어서 오후 12시 즘 눈을 뜬다.
느릿느릿 씻고 집을 치우면 2시가 금방이고
느릿느릿 마실을 다녀오면 금세 또 저녁이다.
뭐라도 좀 하고 싶은데 하루가 너무 짧다.
사람을 만나지 않은지 꽤 됐다.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력이 없다.
가끔 몸을 일으키거나 숨을 쉬기도 버겁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건 상상만으로도 피곤하다.
극 I인 친구가 바깥 활동을 길게 하거나
극 E를 만나면 기가 빨린다고 했었는데
그 느낌이 아마 이런 거겠구나 싶다.
항상 E로 살면서 사람들의 기를 빨아먹고
다녔던 내가 떠올라 살포시 미안해졌다.
최근 한 달 변해버린 내 모습에 익숙해져서
이전의 내 모습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서핑이며 배드민턴이며 운동에 빠졌던 난
대체 무슨 힘으로 그 많은 일을 했을까 싶다.
며칠 전 오랜만에 날씨가 쨍하게 좋았다.
눈을 뜨고서 한참 창밖을 보며 앉아있었다.
랑당이 털이 포실포실 일어난 이불을 걷고
뽀송히 빨아둔 새 이부자리를 곱게 폈다.
목욕탕에 가서 몸을 풀었다. 따뜻한 물로
뭉친 근육을 풀고 구석구석 때도 밀었다.
오랜만에 거울을 보며 표정도 좀 지어주고
온몸에 정성껏 로션도 발라주었다.
집에 오는 길 마트에 들러 샤브 밀키트를 샀다.
큰 맘먹고 내게 저녁식사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야채와 버섯을 가득 넣고 장장 2시간에 걸쳐
건강한 한 끼를 만들어 먹였다.
부른 배를 끌어안고 집을 나서 산책길에 올랐다.
모두가 잠든 늦은 새벽, 개울가 옆을 걸었다.
귀뚜라미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밤
나와 오붓이 보낸 시간은 꽤나 만족스러웠다.
하루를 돌이켜보니 참 살뜰히 잘 보낸 듯싶다.
나에게 대접받은 이 기분이 낯설지만 나쁘지 않다.
마음의 아픔을 돌보기 위해 분투했던 지난 한 달,
유일하게 좋았던 건 나에게 너그러운 나였다.
쉬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고
조급함에 시달리지 않아서 좋았다.
내게 늘 밝은 빛만을 요구했던 내가
비로소 나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느낌이다.
심리학 책을 읽다 어느 문장에 한참을 머물렀다.
"나는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나만 빼고."
"타인에게 하는 Yes는 나에게 하는 No와 같다."
지금껏 해본 적 없던 Yes를 이제야 내게 해주나 보다.
고작 하루, 나를 대접해 주고서 몸살이 났다.
3일 밤낮을 내리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마음처럼 살아지지 않는 내가 답답하고
언
제까지 이 짓을 반복해야하나 막막하
지만
이전처럼 나를 몰아세우고 싶지는 않다.
어느 날은 좋고, 어느 날은 퍽 나쁘고.
어떤 때는 웃다가, 어떤 때는 펑펑 운다.
오락가락하는 상태와 감정이 파도처럼
나를 쳐대지만 그럼에도 버텨야 한다.
부디 내일은 좋은 날이기를
잠시나마 웃을 수 있는 날이기를
내일은 파도가 좀 잦아들고 잠잠해지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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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걸린 상담자
03
죽고 싶지도, 떡볶이를 먹고 싶지도 않아
04
처음 느껴보는 기분
05
나를 대접하는 법
06
가을잠을 자는 중입니다
07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우울증에 걸린 상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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