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에 세 번, 집 근처 병원을 찾는다. 서울에서 치료를 받으며 재활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가기 시작할 무렵, 부산에 내려와 찾은 이곳은 재활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꽤나 큰 병원이었다. 6개월 이상의 꾸준한 재활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말에 '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병원을 찾았던 나는 이곳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환자 축에도 못 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경우 뇌졸중이나 불의의 사고로 인한 척수손상을 겪는 분들이 많았고, 몸이 불편한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발달장애로 인해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곳을 찾는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만나는 환자들은 하나같이 휠체어 혹은 유모차를 타고 있었다.
혼자서 움직일 수 없는 그들의 곁에는 항상 보호자들이 함께 있었다. 가끔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 어르신이나 '저 어린것이 무슨 치료를 받을까' 싶을 만큼 작은 아이를 만날 때면 곁에 있는 보호자의 얼굴을 덩달아 살피곤 했다. 그들은 주로 부모였고, 때로는 배우자였으며, 가끔은 자식인 것 같았다.
종종 병원 직원들이 그들에게 익숙한 듯 안부를 물었다. 살짝 웃으며 잘 있다고 대답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고단함이 묻어났다. 어느 날 보호자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한 치료사가 '힘들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잠깐의 침묵 후 그녀는 '그래도 살아있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자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들의 존재가 고맙다는 그녀의 대답에 엘리베이터 안에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정적이 감돌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치료를 받는 내내 그녀의 대답을 곱씹었다. '나라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정말 살아있는 것 만으로도 감사할까?' 여러가지 생각끝에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만약 우리 엄마가 살아있었다면 어땠을까?' 질문을 바꿔 생각해보니 그녀가 어떤 마음에서 그렇게 대답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마가 왔다. 그리고 갔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봄날. 이른 새벽부터 신문배달을 하러 나갔던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황급히 뛰쳐나갔던 아빠는 넋이 나간 채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에 있다던 엄마는 한참이 지나도록 집에 오지 않았고 매일 엄마를 찾아대던 나는 며칠 뒤 큰엄마 집으로 보내졌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엄마가 집에 돌아온다고 했다. 오랜만에 찾은 우리 집 안방에는 침대가 놓여있었고 그 침대 위에는 낯선 사람이 누워있었다. 아빠는 그 사람을 보고 우리 엄마라고 했다. 1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도저히 우리 엄마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낯설어져 있었다.
엄마의 머리는 속을 들어낸 듯 반틈이 움푹 패여있었고 큼지막한 흉터와 듬성듬성한 머리카락이 머리를 겨우 덮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음이 따뜻했던 엄마는 오간데 없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 숨을 헐떡이는 사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분명 살아있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할아버지가 그 사람의 병간호를 해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늘 내게 엄마와 인사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낯선 존재가 두려웠던 나는 한참을 머뭇대다 이내 큰엄마 집으로 도망쳐버리곤 했다. 그 사람에게서 나는 병원 냄새가 싫었고, 나를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우는 것이 무서웠다.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그 사람을 찾아갔던 어느 날, 어쩐일인지 할아버지가 그 사람을 안아주라고 했다. 마지못해 주저주저 다가갔더니 나를 발견한 그 사람이 갑자기 버둥거리며 짐승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놀란 나는 그대로 뒷걸음질을 치다 주저앉았고 할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그 사람을 끌어안고 같이 울기 시작했다.
낯설다 못해 두려웠던 그 모습은 내가 본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며칠 뒤 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낯선 이들의 시선을 피해 방구석에 숨어있던 나는 큰엄마의 손을 잡고 시장에 따라나섰다. 손님들에게 드릴국거리를 산다는 큰엄마의 말에 나는 신이나서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콩콩 뛰었다. 그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소고깃국을 실컷 먹었다.
마당 화단에 봉선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어느 여름날 아침. 양손에 꽃을 한 움큼씩 집어 들고선 할아버지에게 봉숭아 물을 들여달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지금은 안된다며 오늘이 지나면 빨간 물을 들여주마 하셨다. 나는 그날이 무슨 날인지도 모른 채 그저 어서 내일이 되어 꽃물을 들일 수 있기만을 기다렸다.
그 날 꽃처럼 피어났던 한 젊은 여자의 생이 꽃과 함께 떨어졌다.
그렇게 엄마가 갔다.
존엄한 죽음, 존엄하지 못한 삶
그날로부터 15년이 지난 어느 봄날. 나는 노년 심리학 수업을 들으며 존엄한 죽음에 대해 배우고 있었다.
'존엄사란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의학적으로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치료를 중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생각 없이 눈으로 문장을 더듬어 내려가던 나는 마치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올 것 같은 느낌에 그대로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그 사람이, 우리 엄마라는 사람이 존엄한 죽음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이라는 것을 맞이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이 휘몰아쳤다.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살아온 나 자신이 부끄럽고 미웠다. 그날 나는 가슴팍에 시퍼렇게 멍이 들도록 가슴을 내려치며 몇 시간을 짐승처럼 울었다.
자신을 보고 도망가는 딸을 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를 볼 때마다 이상한 소리를 내며 눈물만 뚜룩뚜룩 흘려대던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굳어버린 육신에 갇혀 움직이기는커녕 말 한마디조차 하지 못했던 엄마가 나를 보며 짐승처럼 울었던 그날이 생각났다. 그날 엄마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이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답답하고 얼마나 두려웠을지. 살려달라는 말도, 살고 싶다는 말도, 죽기 전에 딸아이 얼굴을 보여달라는 말도 할 수 없었던 엄마가 어떤 심경이었을지는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딸을 두고 가는 어미의 마음을,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않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녀가 이별을 준비할 기회를 앗아버렸으며, 그녀를 지키지 못했던 나는 그저 어리고, 무지하고, 무력한 아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떠난 뒤 모든 것을 알게 된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쉬이 용서할 수 없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엄마를 보내고 20년을 살아오면서 엄마를 그린 적이 참 많다.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던 날과 첫 직장에 출근하던 그 날. 삶에서 큰 성취를 해내거나 누군가의 축하가 필요할 때면 엄마가 생각났다.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라는 아쉬움은 마음 한 구석에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간을 만들었다.
노력했던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날. 삶의 좌절을 온몸으로 겪으며 무너져 내리던 순간에도 어김없이 엄마를떠올렸다. 엄마품에 안겨 엉엉 울고 싶었고 '괜찮다. 괜찮아질 거다' 라는 다독임과 위로를 받고싶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간절하게 원한다 해도, 그 어떠한 노력을 들인다해도. 나는 이번 생에서 '엄마'라는 존재를 가질 수 없는 거였다. 그 아프고 가혹한 사실은 내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의 20대는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는 시기이자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였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만들까 싶을 만큼 아프고 힘들었던 20대의 끝자락, 엄마의 20번째 기일에서야 나는 나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엄마가 없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거부하고 회피해오던 그 현실을 직면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올해 초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엄마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나보다 먼저 결혼을 준비하며 엄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감정들을 주고받던 친구들의 모습과는 달리 내 곁에는 그 모든 과정을 함께 해줄 사람이 없었다. 혼자서 해나가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괜스레 마음이 헛헛하고 그녀의 빈자리가 참 크게 느껴졌다.
결혼식장을 찾은 수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마음속으로 '만약 엄마가 그곳에 있었다면 어땠을지, 나의 결혼식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지'를 가만히 상상해 보았다. 나는 대답 없는 엄마에게 엄마 몫까지 내가 행복하게 잘 살아보겠노라 약속했다.
'그럼에도 아들이 살아있어줘서 고맙다'는 그녀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나 또한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그녀가 어떤 상태 건 상관없이 '나의 곁에 살아있어 줬다면' 하고 바라왔었기에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짐작 할 수 있다.
엄마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그래서 23년이라는 시간 동안 치료와 재활을 받았더라면. 그녀는 조금씩 나아지고, 움직이고, 말도 하며 많이 회복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나 또한 엄마의 곁에서 그녀를 돌보고, 도우며, 병원비를 벌기 위해 고군분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나에게도 누군가가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힘드시지 않냐고. 그러나 나도 그 보호자처럼 대답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살아있어서 감사하다고.
엄마가 이곳을 떠난 것이 이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 고통스러워서인지 아니면 이 고단한 세상을 살아내야 할 나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전자라면 엄마는 고통없는 곳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테지만, 후자라면 엄마의 생각은 한참 틀렸다. 나는 엄마가 없어서 이세상을 참 고단히 살아왔으니까. 그래서 나는 일찍 떠나버린 엄마가 그저 야속하고 많이 아쉽기만 하다.
혹시 곁에 누군가가 아프거나 병들어 함께 고통 속을 걷고 있다면 언젠가 그에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래도 당신이 있어서 좋고, 그럼에도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고. 만일 자신이 그런 존재라서 당신의 존재가 혹여나 짐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다면 그런 생각을 접어두길 바란다. 당신은 존재 만으로 힘이자, 누군가가 삶을 견뎌내는 이유일 테니.
오래전 내 곁을 떠난 엄마는 여전히 내 삶의 언저리에서 많은 것을 불러일으킨다. 가끔은 감당할 수 없는 먹먹함에 눈물짓게 하고, 때로는 따뜻해져오는 마음에 웃음짓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