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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이와 함께 한 일주일

동백꽃 필 무렵에 만난 나의 동백이 1

나는 드라마를 잘 안 본다. 안 좋아해서가 아니라 너무 좋아해서 안 본다는 게 맞겠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깊게 빠져드는지라 가급적이면 시작 자체를 하지 않도록 자중하는 편이다. 그래서 지난 10여 년 간 무수한 대작들이 우리나라를 들썩이는 동안에도 나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동안 온쓰앵님들이 자꾸만 전적으로 자기를 믿어야 한다고 했고, 얼마 전까지 무슨 말만 하면 후라이까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정말 궁금했지만 나는 끝끝내 눈길을 주지 않았다. 언젠가 때가 되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날이 올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중 몇몇과는 운명적인 만남을 갖기도 했다. 다소 비현실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인 이야기들이었지만 나는 마치 드라마 속 세상에 살고 있는 양 극에 몰입해 웃고, 울고, 분노했다. 900살 먹은 도깨비에게 홀려 오열하는 내 모습은 몹시 남사스러웠지만 그들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은 눈부셨다.


10년 사이에 유일하게 시청한 드라마 도.깨.비.

 



몇 주간 매일 아침 눈떠서부터 눈감을 때까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안 좋은 소에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어렵사리 터키까지 날아왔건만 재판은 죽을 쑤고 있고, 망할 코로 나 때메 예약하는 족족 비행이 취소되었으며, 이제는 아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집 안에 갇혀 있자니 가뜩이나 복잡한 머릿속이 더 복잡해져 왔다.


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당장 어디로든 떠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곤 고작 한평 남짓한 발코니뿐. 나는 답답한 마음을 벗어던지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기 위해 넷플릭스를 다운 받았다.


화면을 켜자마자 드라마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동백꽃 필 무렵> 몇 달 전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꼭 보라고, 두 번 보라고 노래를 부르던 것이 떠올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드라마나 실컷 봐야지!' 비장한 마음으로 1화를 클릭하며 나는 천천히 옹산으로 걸어갔다.


아주 익숙한 드라마 포스터. 제 글에 인용된 모든 구절은 임상춘 작가님의 소중한 글입니다.


옹산 주민이 되신 걸 환영합니다.

모두가 재벌에 절세미인에 초능력자인 여느 드라마들과는 다르게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나왔다. 캐릭터들이 어찌나 생생하게 살아있는지, 찰진 대사를 쳐대는 동네 아줌마들부터 경찰서 소장님까지. 우리 동네 어딘가에 실제로 있을 것만 같은 이들이 함께 복닥대며 살아가는 것이 소소하게 재미졌다.

 

그치만 지금껏 차갑고 시크한 도시 남자, 그것도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남자들만 만나 온 내게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은 한참 모지래 보였다. 이름도 용식이가 뭐야 용식이가. 분명 누군가 남주가 멋지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끝마다 '~구유 ~해유' 라며 구수한 접미사를 붙여대는 저 촌스런 남자가 대체 어디가 어떻게 멋지다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채 몇 편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가 왜 촌므파탈이라 불리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그의 치명적인 촌스러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애진즉에 모든 이들이 용식 앓이와 동백타령을 끝내고 나서야 이 드라마에 빠져든 나는 그렇게 장장 일주일을 옹산 주민으로 살았다.


옹벤져스 언니들과 소장님의 매력은 동백이와 용식이를 뛰어넘는다


40회를 내리보며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른다. 향미가 가여워서 한 번, 필구가 딱해서 한 번, 용식이의 순정이 고마워서 또 한 번.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을 터트리며 극에 빠져들고 있던 내 눈에 어느 순간부터 동백이가 밟히기 시작했다. 그녀가 등장해 대사를 고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마음 언저리가 시큰거려 보고 있기가 힘들다.


분명 나는 부모가 있고, 애는 없고, 저렇게 길고 예쁘지 않은데.. 동백이에게서 자꾸만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사건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의 상황들이 오버랩되었고, 그녀가 느꼈을 감정과 받았을 상처들이 마치 나의 것인 양 고스란히 마음으로 전해져 왔다.


그날 이후 나는 밤낮 할 것 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동백꽃 필 무렵'에 빠져들었다. 리고 지난날의 나를 마주하는 심정으로 동백이를 바라보며 한 장면 한 장면에 마음을 쏟아부었다.


지금부터 4편에 걸쳐 풀어나갈 글  <동백꽃 필 무렵에 만난 나의 동백이>는 내 삶에서 찾아온 동백이, 그리고 그 동백이를 통해 바라본 나에 관한 이야기이다.



본 이야기는 '동백꽃 필 무렵에 만난 나의 동백이 2'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duckyou-story/50


어김없이 멋진 그림으로 글에 숨을 불어넣어 준 일러스트레이터 노콩 Instagram : @rohkong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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