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쁜데, 잘 살고, 착하기까지 하면 어쩌라는 거야?

동백꽃 필 무렵에 만난 나의 동백이 2

이 글은 1편부터 4편까지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전 편을 먼저 봐주세요.

https://brunch.co.kr/@duckyou-story/40

 



'술집 여자의 딸, 고아원 출신, 병균 덩어리' 어른들이 붙인 몹쓸 딱지들을 달고 살아가는 동백이를 보며 나의 어린 날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보호막 없이 혼자서 살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수많은 순간들 속에서 나는 어린 동백이처럼 항상 외롭고 초라하고 잔뜩 주눅 든 아이였다.


'애미없는 애, 계모가 키우는 애, 못 사는 집 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에게 붙여졌던 딱지와 내 귀로 들려오던 수군거림 들은 나를 더 볼품없이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못 들은 척 아닌 척 외면하려 했지만 마음속을 깊이 파고든 말들은 금세 뿌리를 내렸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말들은 열등감을 만들어내었고 그 열등감은 어른이 되어서 까지 나를 괴롭혔다.


동백이가 싫어하던 애들. 부잣집 외동딸, 막내딸, 고명딸 같은 애들. 막 곱게 머리 땋아서 학교 오고 머리에서도 항상 좋은 냄새나는 그런 애들. 짜증 나리만큼 이쁘게 웃는 그런 애들을 나 역시도 이유 없이 싫어했다. 좋은 부모님 밑에서 사랑 듬뿍 받으며 자라 철딱서니 없이 마냥 포스럽게 사는 애들을 볼 때마다 그러지 못한 내 인생과 자꾸만 비교돼서 속이 꼬이고 질투가 났다.


보는 내내 마음을 저리게 했던 어린 동백이


어쩌다 이쁜데, 잘 살고, 착하기까지 한 이들을 만나면 멀찌감치 밀어냈다. 그들은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내 못난 심보 때문인 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볼 때마다 뾰족뾰족 모난 마음이 나를 찔러대는 탓에 견딜 수가 없었다. 너른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밀쳐냈다.


누군가를 내 사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도 엄격한 심사를 거쳤다. 살면서 힘든 고비 한번쯤은 넘겨봤어야 했고, 남 모르게 아픈 상처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 했으며, 결핍과 부족을 겪어 본 사람 이어야 했다. 아무도 모르게 진행된 나의 평가에서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 이들은 조용히 선 밖으로 밀려났다. 


나는 견고한 성벽을 쌓아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놓고 나를 이해해 줄 수 있고 내가 이해할 수 있을법한 사람들만 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렇게 나의 세상 속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다독이며 사는 것이 나를 위해서도 그들을 위해서도 맞는 일이라 생각했다.


동백이는 분명 사랑스럽고 맑은 웃음을 지닌 아이였다.


착한 척, 괜찮은 척, 강한 척.

20대의 나는 남들이 보기에 항상 웃는 사람이었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선배들이 '밝음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만큼 늘 밝으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잠시라도 웃음기 가신 내 얼굴에는 금세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 그늘을 알아챈 누군가가 '너는 눈이 왜 그렇게 슬프냐?' 물어보곤 했다.  

 

은근슬쩍 떠보는 듯한 질문을 받을 때면 '탁' 하고 맥이 풀렸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늘을 숨길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졌다. 누군가에게 사연 있는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던 나는 그늘을 들킬 때마다 어둠을 가릴 더 두꺼운 가면을 찾았다.  

   

한참 뒤 나에 알게 된 누군가로부터 '너는 마냥 행복하게 살아온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노력이 먹혔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쳤지만 마음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가 갖고 싶었던 건 억지로 만들어낸 가짜 밝음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난 맑음이었으니까.      

     

티 없이 맑고 싶었던 나의 바람과는 달리 나는 사실 닳을 대로 닳 꼬일 대로 꼬인 사람이었다. 되고 싶었던 나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나의 민낯을 마주할 때마다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런 나를 인정는 것뿐이었다.     


드라마를 본 사람 만이 알고 있을 '책과 잔'

     

나는 나의 세상 속 사람에게 한없이 배려심 깊고 인내심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 세상 밖 이들에게는 쉽게 분노하는 사납고 드센 사람이었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내게 해를 가하거나 나를 무시할라치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하악질을 하며 이빨을 드러내었다.  


살면서 혼자라 느껴졌던 순간마다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으니 나 스스로 지켜야한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다시는 짓밟히거나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칼을 갈았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하마로 변한 동백이의 모습은 속으로 잔뜩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면서도 고개를 쳐들고 악을 쓰던 내 모습과 닮아있었다.  

               

동백이가 그랬다. '마리오도 점프를 하면 동전을 받는데, 개도 앉으면 간식을 받는데 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렇게 늘 벌만 받는 거냐고'  그 말을 들은 내 머릿속에선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 앞에 '나는 행복하면 안 되는가' 한탄했던 날들과 '괜찮은 척도 강한 척도 이제 더는 못하겠다' 소리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용식이의 품에 무너지듯 안겨 아이처럼 엉엉 우는 동백이를 보면서 그녀의 마음속에 쌓아온 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픔을 숨기며 괜찮은 척 해왔던 지난날의 내가 오늘 나의 민낯을 드러낼 수 있게 되기까지. 스스로 셀 수 없이 무너뜨려야 했던 그 벽을 그녀 역시 허물고 있었다.

     

두렵 약한 모습을 보이는 , 힘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도. 누군가로부터의 보호를 받아본 적 없는 이들에겐 아주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이전보다 용감해진 지금의 나는 억지스러운 밝음으로 그럴싸하게 꾸민 보다 눈물기 머금은 담담함을 지닌 내가 좋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법을 알게 된 동백이 만큼이나 괜찮지 않은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지금의 내가 자랑스럽다.  



본 이야기는 '동백꽃 필 무렵에 만난 나의 동백이 3'으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duckyou-story/49


어김없이 멋진 그림으로 글에 숨을 불어넣어 준 일러스트레이터 노콩 Instagram : @rohkong_

Copyright © 노콩 All Rights Reserved


매거진의 이전글 동백이와 함께 한 일주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