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23일. 그날은 우리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병원 방문과 재판 준비, 코로나로 인한 비행편 변경으로 눈코 뜰 새 없이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나 보낸터라, 결혼기념일이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날이 기념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날 아침 한국에서 날아온 한 통의 축하 메시지 덕분이었다.
메시지는 터키에 있는 우리 부부를 대신해 신혼집에 머물며 고양이를 보살펴주던 동생 소라가 보낸 것이었다. " 언니와 오빠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합니다~ " 한껏 들뜬 목소리로 우리를 축하하는 영상에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기념 팻말을 목에 건 우리 집 고양이 두 마리가 담겨있었다.
나조차 잊고 있던 나의 결혼기념일을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서 축하해주다니. 벌써 결혼을 한 지 1년이 되었다는 감회와 함께 생각지 못한 이벤트에 마음이 뭉클하게 젖어들었다.
결혼 후 맞이하는 첫 기념일.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분주해졌다. 가져온 옷들 중 그나마 이쁜 옷을 꺼내어 입고, 언젠가 기념사진을 찍겠다며 챙겨 온 카메라와 삼각대, 면사포를 집어 들었다. 코로나로 모든 가게가 셧다운 된 상황이라 갈 수 있는 곳은 없었지만, 둘이 바닷가라도 걷자며 자고 있는 남편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삼각대를 세워놓고 이리저리 1년 전 신혼여행에서 찍던 포즈를 취해보았다. 그러나 재활치료를 하며 한동안 집에서 먹고 자기만 했더니 둘 다 배가 불룩해져 영 태가 나지 않았다. 결혼기념일 기분을 내겠다고 화관까지 챙겨 왔건만 돌아오는 건 '카피추 같으니 얼른 벗으라'는 남편의 핀잔뿐이었다.
결혼 후 1년이란 시간 동안
시무룩한 표정으로 백사장에 주저앉아 있으니 남편이 다가와 곁에 나란히 앉았다. "기념사진도 좋지만 우리 그간 살아온 이야기나 좀 하자"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앉아있던 남편은 결혼 후 퇴사와 세계여행, 사고와 이후 겪은 일들에 대해 그간 한 번도 나누지 않았던 이야기들 꺼내놓았다.
남편은 바쁘게 앞만 보고 달리다가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쫓기듯 떠난 여행이 사실 조금은 버거웠다며,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여행이 아니라 휴식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마음을 비우고 상황들을 정리한 뒤 한 템포 쉬고 나서 차차 떠나도 되었을 텐데... 그 당시 무엇이 그리 급해 등을 떠밀다시피 떠나기를 채근했는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의 마음을 몰라준 것 같아 미안했다.
결혼 후 매달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새삼스레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던 우리는 비록 지금 가진 것은 없지만 당장 머물 집이 있고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으니 감사하자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1년 전 만신창이였던 때에 비해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나아졌는지, 찾아보면 감사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도.
특급 레스토랑으로 초대합니다
한참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생각지도 못한 깜짝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Zeliha언니와 Arda가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거실에 직접 레스토랑을 오픈한 것이다. Arda는 제 손으로 꾸민 테이블에 우리를 앉히고서는 직접 만든 메뉴판을 가져와 오늘의 코스를 설명했다.
언니는 우리를 위해 손수 만든 음식과 케이크를 구워내 왔다. 모든 것이 삐까뻔쩍한 고급 레스토랑도, 먹자마자 헉소리나는 일류 셰프의 요리도 아니었지만 내겐 그날의 만찬이 이 세상 어느 곳의 누가 만든 그 어떤 요리보다 근사하게 다가왔다.
이 세상 하나뿐인 레스토랑에 앉아 투박하지만 마음이 담긴 요리를 먹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1년 전 신혼여행을 함께하고, 첫 번째 결혼기념일을 함께 보낼 수 있어 행복하다는 언니에게, 우울하게 기억될 뻔했던 나의 결혼기념일을 특별하게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오늘은 우리 부부의 3번째 결혼기념일이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에 '매 기념일마다 근사한 데 가서 저녁을 먹자'라고 약속했건만 오늘도 근사한 레스토랑에 갈 계획은 없다. 대신 바다가 보이는 아담한 식당에 들러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메뉴를 하나씩을 시켜놓고 오붓하니 수다를 떨며 저녁을 먹어볼까 한다.
첫 번째 결혼기념일에 안탈리아 바닷가에서 찍은 영상을 봤다. 결혼 후 처음으로 나누었던 속 깊은 이야기 속엔 지난날에 대한 탄회와 앞으로 다가올 날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있었다. 2년이 지난 오늘 남편을 위한 편지 속엔 지난날에 추억과 앞으로 다가올 날에 대한 기대를 담았다. 오늘 저녁 삶에 유일한 이유이자 원동력인 남편에게 그간 말 못 한 마음속 미안함과 고마움, 찡함과 사랑을 들려주려 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한다. 우리 부부의 지난 시간은 멀리서 보기엔 비극, 가까이서 보기엔 희극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무수한 희(喜)와 비(悲)를 교차하며 함께 울고 웃었다.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지난 시간들이 무엇으로 기억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 시간들이 비극으로만 남겨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