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사는 삶의 고단함

한국과 터키의 평행이론

지금부터 풀어나갈 이야기는 다른 듯 너무나도 닮아있는 '여자'들의 삶에 관한 것이다. 8000km 가까이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평형우주에 사는 듯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터키와 한국 여자들의 이야기. 어디선가 본 듯 기시감이 들었던, 그래서 참 친숙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불편했던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터키에서 마주했던 무수한 장면들은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들과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터키 여자들의 삶의 모습이 과거 유교문화가 팽배했던 시절의 한국 여자가 살아온 삶의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물론 큰 도시에서 나고 자라 다양한 삶의 방식을 경험한 이들의 경우 지금도 그들의 문화와 환경의 제약에서 벗어나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는 터키라는 나라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은 생면부지 이방인인 나에게 낯설기보단 익숙하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두 곳에서의 삶이 닮아있음을 자각 한 것은 라마단이 끝난 바이람 연휴 때였다. 전국 각지에서 부모님 댁으로 모여든 친척들을 맞이했던 어느 날, 나는 몹시 익숙한 듯 불편한 장면들을 목격했다. 분주하게 음식을 하고 차를 끓이며 손님을 맞이하느라 여념이 없는 여자들과 약속이나 한 듯 거실 소파에 모여 앉아 꼼짝 않고 다과를 받아먹는 남자들의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어린 시절 어느 명절날로 돌아간 듯했다. 분주히 음식을 해다 나르고, 제사상을 차리고 다시 치운 뒤, 부엌 구석에서 겨우 밥을 먹는 여자 어른들의 모습과 가만히 앉아 제문을 쓰거나 기껏해야 밤 정도를 깎다가, 차려다 주는 술상을 받아먹고 마신 뒤 낮잠을 퍼자던 남자 어른들의 모습이 지금 내 눈앞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였다.


그때 당시에는 미처 이상하다거나 부당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어리기도 했지만, 20년 동안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보면서 나도 모르게 차츰 그런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그것이 부당하고 못마땅하다는 생각을 한 건 내가 그 '여자 어른의 역할'을 하게 된 뒤부터다. '왜 내가, 왜 여자만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30살이 넘어서야 하게 된 것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무심히 넘겨왔던 잘못된 익숙함 때문이다.

우리집 디폴트다 - 일하는 엄마 누워있는 아빠 ㅍ_ㅍ
내 아들보다 이쁜 남의 아들

함께 지냈던 터키 가족 안에서도 남녀 간의 불평등이 존재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집안일을 하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고 종종거리는 반면 아빠는 죙일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툭하면 친구들을 만난다며 집을 나섰다. 그 집에는 나와 동갑인 큰 아들과 중학생 나이의 장성한 손자가 있었지만 두 언니들 외에는 어느 누구도 엄마를 돕기 위해 손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와 남편은 부엌에 나와 매 끼니 식사 전 후 식탁 세팅을 도왔다. 처음에 엄마는 손사래를 치며 남편을 말렸지만 '엄마 밥을 받아먹으려면 모두가 집안일을 함께 해야 하며, 한국에서 우리 부부는 모든 일을 같이 한다'는 나의 강력한 어필에 못 이기는 척 남편을 받아주었다.


이후에 남편은 어깨가 안 좋은 엄마를 대신해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 너는 일을 맡아했고, 엄마는 남편의 도움에 유독 고마워하며 조금씩 집안일을 나눠주셨다. 그렇게 남편은 터키 엄마 집에서 '집안일을 돕는 최초의 남자'가 되었고, 머지않아 '막내아들보다 이쁜 남의 아들'이 되었다.

엄마를 웃다가 울게 만들었던 예쁜 아들 & 딸


웬수같은 남편놈과 30년을 산다는 것

엄마는 지난 30년 간 반 백수인 아빠를 대신에 뜨개질을 해다 팔거나 아기를 돌보며 살림을 살았다. 그리고 그 돈을 알뜰히 모아 자식들을 키우고, 집을 넓히며 어렵사리 삶을 꾸려왔다. 고생하는 엄마와 빈둥대는 아빠를 보는 날이 늘어나면서 내 속에서도 슬그머니 열불이 끓어올랐다. 마냥 좋았던 아빠가 조금씩 미워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돈 문제로 아빠와 엄마가 다툰 날이 있었다. 돈이 없다며 쓴소리를 하는 엄마에게 아빠는 뭐라고 큰 소리를 지르고는 집을 나가버리셨다. 나는 부엌에 앉아 눈물을 훔치는 엄마에게 가만히 다가가 앉아 무슨 일인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엄마는 '무책임한 남편 때문에 힘들다. 돈을 벌 생각을 안 하고 계속 자존심만 세운다'며 번역기에 불이 나도록 하소연을 하셨다.


한량 남편을 둔 아내의 고달픈 삶은 한국에서도 익히 보아왔기에, '아빠는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냐. 우리 한국의 엄마도 많이 힘들어한다. 모든 아빠들이 문제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한참 동안의 아빠 뒷담화 토론의 장이 펼쳐진 뒤 엄마는 한결 가벼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빠가 비록 좋은 남편은 아니지만 너희에게는 좋은 아빠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날 우리 부부는 두 사람을 위한 작당모의를 했다. 나는 엄마에게 슬쩍 다가가 '아빠 몰래 준비했다며 급한 일에 쓰라'고 용돈을 건넸고, 신랑은 아빠에게 '엄마 몰래 주는 것이니 기름값에 보태쓰라'고 돈을 쥐어드렸다. 그 돈이 두 사람의 오랜 갈등을 해결해 줄 수는 없지만, 그날 만이라도 두 사람이 각자의 비밀을 품은 채로 조금은 든든히, 조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잠들었기를 바란다.

이렇게 고운 아가씨를 데려갔으면 뼈를 갈아서라도 행복하게 해줬어야했다 아빠는!!!!
사랑과 헌신이 행복을 보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의 큰 언니 젤리하는 정이 많은 사람이다. 길을 가다가 휴지통을 뒤지는 노숙자가 있으면 빵과 과일을 쥐어 보내주고, 어디서든 자신을 헌신해서 봉사하고 남을 돕는 것에 익숙하다. 사랑이 많은 그녀는 결혼 생활에서도 많은 사랑을 주었다.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보고 사랑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의처증과 집착으로 그녀를 힘들게 했고 그녀는 견디다 못해 이혼을 했다.


두 번째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모두가 재혼 가정이었던 두 사람은 이전의 가족과 정리되지 못한 관계를 이어가며 서로를 힘들게 했다. 그녀는 2번째 남편을 정말 사랑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고, 늘 전 부인과 연락하며 언니를 비참하게 했다.


그는 자주 사고를 쳐서 경제적 문제를 일으켰고, 뒤치다꺼리를 하고 돈을 밀어 넣느라 언니는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자 그놈은 떠났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언니를 실컷 이용해먹고선 자신이 사랑했던 이전 부인에게로 돌아가버렸다. 그놈이 떠난 후 언니는 많이 아파했다.


이용당했다는 배신감에 그 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이 남아 몇 년 간 아파했다. 사고 후 아빠를 보고싶어하는 아들과 그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가족들 사이에서 맘고생을 하던 그녀는 내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많이 울었다.


아직 결혼이 뭔지, 가족이 뭔지, 사랑이 뭔지 깊이 알지 못한 나로서는 그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녀의 들썩이는 어깨를 어루만져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언젠가 그녀를 건강하게 사랑해 줄, 사랑받을 가치가 충분하다는 걸 깨닫게 해 줄 사람을 만나게 되길 기도 할 뿐이다.

눈에 넣어도 안 아팠을 큰언니 젤리하와 둘째 세빌언니


엄마가 아내가 아닌 '나'라는 이름으로

둘째 언니 세빌은 대학 시절 호텔관광을 전공했다. 젊었을 적에 터키에서 손꼽히게 큰 호텔에서 호텔리어로 일했었고,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젊은 시절 사진 속에 언니는 참 예뻤다. 큼지막한 눈망울에 사람을 따뜻하게 해주는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얼마나 멋진 호텔리어였을지는 보지 않아도 훤히 그려진다.


언니는 나에게 종종 그곳에서 일했을 때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 시절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자신이 가장 빛났던 시절을 회상하는 언니의 두 눈이 반짝이는 걸 보았다. 언니는 그때에 비해 자기가 얼마나 살이 찌고 변했는지 자신의 뱃살을 집어내어 보여주며 하하하 웃었지만, 언니는 내가 한국에서 가져다준 마스크팩과 화장품을 꺼내어보며 자기도 아름다운 여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결혼 이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자연스레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돌보기 시작했다. 남편을 따라 예실로바라는 작은 시골에 들어와 산 이후로 아이들과 집에만 있었다. 공무원인 남편이 안정적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지만 언니는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고, 할 수 있다는 느낌을 느끼며,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가 아닌 세빌이라는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일.


언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소가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이다


우리가 떠나기 얼마 전부터 언니는 일을 시작했다. 언니가 사는 곳 근처 유명한 터키 현지인들이 찾는 관광지에 있는 식당에서 서빙을 한다고 했다. 그 일 때문에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고, 아이들을 할머니와 외할머니에게 번갈아 맡겨야 했지만 전화기 건너편으로 들려오는 언니의 목소리는 밝았다. 나는 언니의 마음을 알았기에 전화기 너머로 언니의 새 시작을 응원하며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종종 언니와 통화를 했다. 식당 서빙, 휴게실 매점, 은행 청소. 언니는 여러 가지 일들을 바꿔가며 했고, 일이 너무 재미있다며 자신이 일하는 곳에 식구들을 번갈아 바꿔주며 신나했다. 일을 한다는 것이 언니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곳에서 언니는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행복해 보이는 언니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그곳에서의 시간들이 언니의 행복을 계속해서 채워주면 좋겠다.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가는 삶

우리가 파누르를 만난 건 첫 번째 신혼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한국인은커녕 외국인이라고는 본 적이 없을 작은 시골마을에 우리 부부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때 당시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었던 파누르의 친구는 우리를 보자마자 파누르에게 동네에 한국인이 출몰했다는 신기한 소식을 알렸다. 어려서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고 한국어에 능통했던 그녀는 우리와 대화를 이어나갔고 그렇게 그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10대 때부터 한국 드라마를 보며 한국에 대한 마음을 키웠던 그녀는 약 10여 년 간 혼자서 한국어를 익히고,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한국 기업에 터키어 통역일을 하며 차근히 한국으로의 유학을 준비했다. 딸이 자신들의 곁에 머물기를 바라던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의 한국사랑을 마냥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가 가진 것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꾸준한 열정임을 알게된 부모님은 그녀를 응원하게 되었다. 당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모든 과정을 혼자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은 당돌한 대학생을 넘어 흡사 여전사 같았다.


3년 전 한국 유학의 꿈을 꾸던 그녀는 얼마 전 대학과정을 마치자마자 터키 국가장학생으로 한양대학교 공학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 그 꿈속에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영상으로 찍어 유튜버로 활동을 시작한 뒤로, 터키에 있는 무수한 여학생들이 그녀의 삶을 동경하며 자신만의 꿈을 꾸게 되었다. 다음 세대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잘해야 한다는 그녀의 말처럼, 그녀가 만들어 낼 제2, 3의 파누르들이 기대된다.

3년 전 터키에서 처음 만난 그녀와 다시 만난 날



터키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에게서 한국의 여느 동생, 언니, 엄마들의 모습을 보았다. 이국만리 떨어져 있지만 같은 것을 느끼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많은 것을 공감했다. 사랑과 결혼의 달콤 씁쓸함, 출산과 육아의 어려움, 경력이 단절되어 느끼는 속상함과, 무능한 남편과 함께 살아가며 겪는 어려움들은 내가 나고 자라온 그곳에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주장하고 싶은 것도, 여자와 남자의 편을 갈라 여자를 피해자로, 남자를 가해자로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여자로 살면서 마주했던 상황들과 알게 모르게 주어지는 제약들 앞에서 느꼈던 감정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 속에 예외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 많은 이들의 삶 속에서도 충분히 일어 남직한 일이니 말이다.


여자로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쉬이 바뀌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과 바뀔 생각이 없는 거대한 세상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비록 내가 누군가의 삶을 바꿔줄 수는 없지만 나의 삶 만은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방향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믿고싶다.


지금도 나는 계속해서 어떻게 살아갈지, 어떻게 행복을 찾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나를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여자라서 불행하고 아쉬운 마음'보다, '여자로서 행복하고 만족스런 마음'을 찾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믿는다.


20대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여자로 살기->

https://youtu.be/TMAa1AYa7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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