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영잉 Jul 13. 2023

손톱에 남은 핫핑크 매니큐어

프라하민박 거실에서 꺼내보는 여행 이야기

레논 벽,

'언젠가 프라하에 가면 꼭 한번 가봐야지'하고 구글지도에 별 표시 해놓은 장소들은,

프라하에 머문 지 이 주가 다 되도록 지도 위에서 그저 외롭게 표류 중이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발바닥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좋아 도저히 안 나갈 수가 없단 말이지.

침대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발바닥을 주무르며 엄지손가락으로는 슥슥 지도 위를 표류 중인 별들을 하나씩 눌러본다.


'나! 산책 갔다 올게!'


우리 민박집은 ’나 프로지코프예‘라는 유명한 쇼핑 거리의 골목에 위치해 있어, 여느 유명 관광지까지 도보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그래도 프라하에서 살고 있는데, 한산한 대낮에 굴뚝빵 하나 들고 까를교는 건너봐야 하지 않겠나!


아무렴 발은 아파오더라도 이렇게 햇빛을 받으며 조금씩 내딛는 것이, 집에서 쉬는 것보다 5.8 배쯤 더 행복했다.


한껏 산뜻한 산책을 즐겼다.

공원을 지나다가 잔디에 앉아 기타 치며 노래하는 사람을 보면 그 곁에 풀썩 앉아 노래를 들으며 일기를 쓰기도 하고, 구름 뒤에 있던 해가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면 잠시 거꾸로 걷기도 했다.


지도가 알려준 예상 도착 시간은 10분 남짓이었지만 처언-천히 걸어 한 시간쯤 걸렸다.



도착한 곳은 레논 벽이었다.

레논 벽은 말라스트라나 지구의 대수도원 광장 안에 있는 주체코 몰타기사단 대사관의 일부이다.

이 벽은 원래 1960년대 이후 사랑에 관한 시, 정권에 저항하는 글이 적히는 장소였는데, 1980년대 이후 비틀스 멤버였던 존 레논의 노래 가사와 그와 관련된 그라피티, 그리고 그 시대의 세계적 이슈를 다룬 그림들로 채워졌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 그림들도 바뀌어갔고, 처음에 있었던 레논의 초상화는 새로 그린 그림들 아래 덮였다.


그 시대의 사건과 가치, 사람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한 그 벽은 아직까지도 활기가 가득했다.

비록 지금은 지정된 곳에 오직 '사랑과 평화'에 관한 메시지만 쓸 수 있게 됐지만.


혼자 벽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으니, 멋진 곱슬머리칼을 가진 언니가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다가왔다.


'혼자 여행 왔어? 내가 벽 앞에서 사진 찍어줄까?'

'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려요!'


얼굴에서 광이 난다


소염제

오늘은 체코 약국에서 파는 소염제가 효과가 좋다는 어떤 블로거의 글을 보고는, 기대를 한가득 안고 민박집을 나섰다.

집 앞 약국은 어쩐 일인지 요즘 계속 문이 닫혀있어, 조금 떨어진 팔라디움*으로 향했다.


* 팔라디움은 프라하에서 제일 큰 쇼핑몰이자, 나프르지코페 거리를 쭉 걸어가면 시민회관 맞은편에 있는 분홍색 건물이다.


팔라디움에 들어서자, 외관과는 사뭇 다른 화려한 조명과 인테리어에 활기찬 분위기를 느꼈다. 원래의 목적을 잠시 잊고 쇼핑객들 사이에 녹아들어, 이리저리 상점을 드나들었다. 필요했거나, 필요할 것만 같은 물건들을 몇 개 구매하기도 했다.


정신 차리고 다시 약국 찾기.

이리저리 찾아보다가 더 많이 걸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직원에게 미리 준비한 휴대폰 화면을 보여드렸다.


‘Promiňte! Kde je lékárna?‘

(실례합니다! 약국은 어디입니까?)


핸드폰 유심이 없는 나는, 민박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예상되는 상황에 맞는 체코어 문장들을 미리 준비하곤 했다.

'약국', '진통제', '소염제', '발바닥 근육이 아파요' 등


팔라디움 백화점 약국은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쇼핑객들 사이를 비집고 약국 문 앞에 다다른 그때, 옆에서 얇고 여리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칭챙총!'


'엥...? 칭챙총?‘

‘그 말로만 듣던 칭챙총? 전통적인 인종차별 어쩌고 그 칭챙총?'


옆을 돌아보니,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그 말을 내뱉고는 엷은 웃음을 띠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이럴 수가, 낡은 사람도 아니고 저렇게 어린아이가'

뒤에 있던 부모를 한번 쳐다보니, 아무 말 없이 눈을 피한다. 화가 나기보단 경악스러웠다. 어찌 이 상황에 부모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나.


그 부모의 대처 없는 대처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아이에게 무언가 말해주고자 하는 의지도, 부모에게 이 상황을 지적할 의지도 사라져 버렸다.


이럴 땐 어떻게 대처하는 게 맞을까? 무대응이 맞을까? 부모에게 한마디 하는 게 맞았을까? 그 남자아이에게 직접 단호하게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맞았을까?

집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맴돌았다.

  

팔라디움에서 사온 소염제와 로션



손톱에 남은 매니큐어

해가 저물고 민박집으로 돌아와 거실 책상 끝에 앉아 있으면 종종 손님들께서 말을 걸곤 하신다. 오늘 새로 오신 손님 한 분이 밖에서 사 온 수박 맥주를 건네주셨다.


"이거 진짜 맛있어요! 드셔보세요."


마침 일과를 마치고 민박집으로 돌아온 소영이(손님)가 거실 테이블에 합류했고, 한 데 모여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재밌는 에피소드’를 신나게 풀어놓았다.


이야기는 내 손톱 위에 있는 '다 부스러져 일부만 남은' 핫핑크색 매니큐어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됐다.


"민영님 매니큐어가 거의 다 지워져 가네요?"


이 남루하게 남은 매니큐어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부터 시작됐다. 모스크바에서의 카우치서핑은 어린

여자 아이가 있는 가정집이었는데, 나는 꼬마 친구 아리나와 같은 방에서 지내며 꽤 친해졌다. 자기 전에는 매일 소꿉놀이를 같이 했는데, 어느 밤 네일샵의 손님이 되면서 지금의 핫핑크색 매니큐어를 칠하게 된 것이다.


손님들은 이 무렵의 이야기를 퍽 좋아해 주셨다.


여행이야기 다음은 사진 강습이었다.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오신 손님은 오늘 찍은 풍경들을 설명해 주시며, 사진을 찍는 방법도 간단히 설명해 주셨다. 카메라를 건네어받고, 알려주신 대로 흔들리지 않게 최대한 팔을 몸에 가깝게 고정시켰다.


'저 찍어봐도 돼요?'

나의 첫 필름카메라 모델이 되어준, 젤리 사탕을 듬뿍 사와 신이 난 소영이.


까를교로 맥주 마시러 갈까요? 사진도 찍고요!

그렇게 거실 테이블에서 즉흥적으로 결성된 까를교 맥주 모임.


우리는 아까 마신 수박 맥주의 또 다른 시리즈들을 공수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까를교로 가는 길은 어두웠고 가게들은 거의 문을 닫은 늦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무려 '기념품 가게'에서 그 모든 맥주를 발견했는데, 관광객을 타겟으로 비싼 값을 받는 가게였다. 하지만 늦은 저녁 우리의 낭만을 가라앉히고 싶지 않았기에, 맥주값에 까를교 야경 안주가 포함된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각자 양손 든든하게 차가운 맥주캔을 들고 덩실덩실 까를교로 날아갔다.


까를교 야경을 보러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저 멀리 오렌지색 조명이 비추는 프라하성과 그 아래 물가에 비친 성곽의 잔상들이 아주 예뻤다. 우리는 까를교 다리에 기대어, 작게 노래를 틀고 한참을 서서 맥주와 함께 수다를 떨었다.


오늘은 손님 둘, 스텝 하나 아닌, 여행자 셋이었다.




+

장기 배낭여행을 다니다 보면 한국인 분들을 꼭 만난다. 그들은 꼭 나에게 유용할 것들은 주고 떠나곤 하시는데, 이를테면 일용할 햇반이라던가, 여행하며 만나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줄 선물 같은 것들이다.


모두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고자 하면 못 할 것이 없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