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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Aug 24. 2023

겨울 아침 전기장판 같은 사람들

프라하에 눌러앉은 이유,  그리고 산슬과의 첫 만남


행복해,

자기 암시나 그저 그런 감탄사로써의 말이 아닌, 아주 배우고 아주 동경하고 아주 생각할 수 있게 된 요즘 가득 차 흘러넘치는 말이다.

야간 버스에서 내려 프라하 광장에 첫 발을 딛자마자 딱딱하게 굳어버렸던 두 발바닥은 이제는 꽤 괜찮아졌다. 병원 진료 없이 자연 치유해 보겠노라며, 여행자 보험 없이 배낭여행 온 사실을 꾸짖는 말들을 웃으며 넘기던 때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이젠 혼자 피스타치오 젤라또를 손에 들고 프라하 야경을 보러 갈 수도 있고, 식구들과 함께 장을 보러 갈 수 있다. 비로소 통증 없이 온전히 프라하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라하홀릭 민박집에서 스탭 생활을 한 지 한 달쯤 되어가는 지금이다.


이제 곧 떠나려고,

유난히 쌀쌀한 10월의 체코는, 이곳의 포근함에 듬뿍 취한 나를 더욱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들었다. 마치 겨울 아침 두터운 이불 밖으로 나가기 싫은 마음처럼.


가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 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진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안다.


’이젠 정말 이불을 정리하고 하루를 시작해야겠어.‘


하지만, 곧 짐을 싸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매일 하 면서도,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래 함께 할수록 더 함께하고 싶어져, 도저히 그 ‘곧’에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겨울 아침 전기장판 같은 사람들-



산슬과의 첫 만남,

현우의 프라하 친구인 산슬과 이보가 민박집에 놀러 왔다. 둘은 거실 테이블 맨 끝에 나란히 앉았다.

식구들은 그 둘에 가까운 쪽 테이블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그 옆, 그러니까, 그 둘에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처음 대면한 그들과의 마음의 거리가 반영된 본능적인 좌석 선정인 듯하다.


나는 그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산슬은 여행자들에게 프라하의 이야기를 전하는 전업가이드였고, 이보는 산슬의 일을 도와주는 동업자이자, 체코 토박이, 그리고 산슬의 오래된 유학 친구였다.

우리는 체코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이어갔다.


다들 이야기 쟁이들인지라 대화가 끊이질 않았고, 어떤 것이든 훌륭한 대화의 주제가 되어, 늦은 저녁 손님 없는 민박집이 우리의 수다로 가득 채워졌다.


거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현우의 소울 메이트 코카콜라가 다음 타깃이 되고, 산슬이 이야기를 풀어놓았을 때, 나는 산슬 쪽에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건강에 좋지 않음은 자명한 사실이니 콜라를 마시는 걸 지양하고 있다는 현우의 말에, 산슬의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콜라를 마시길 지양하는 것에 대한 리스펙과 함께, 그 이상 콜라 ‘소비’를 지양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이유를 풀어놓았다.

국제 사회와 환경에 얽힌 이야기를 자신의 의견과 함께 야무지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동경심과 함께 산슬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다음으로 어떤 이야기를 꺼내 줄 지 기대하며 마음만은 산슬의 바로 옆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우리는 우연한 기회에 프라하 여행자 혜성과 함께 이보의 고향, 체코 브르노 지역을 함께 여행했다. 산슬이 사랑하는 식당을 함께 갔고, 새벽 내내 울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눴고, 한밤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들판에서 한참을 별이 뜬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이젠 연례행사로 한국에 들어오는 산슬을 맞이하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고, 긴 휴가를 갖노라면 저 멀리 유럽에 있는 산슬을 보러 갈 계획부터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깊은 인연이 될지 몰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똑부러지는 산슬과 가까워지고 싶었고, ‘내 사람'에게 한 없이 따뜻한 산슬의 저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어느 정도 의도한 바이다.

결국 지금 나는 산슬 언니를 다소 귀찮게 하는 애증의 동생이 되어버렸지만, 꽤 만족스럽다. ‘애’가 ‘증’보다 몇 방울 더 많길 바라며, 곧 있을 언니와의 여행을 준비한다.


                     

귀여운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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