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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Jan 25. 2024

마약 등대

러시아 가장 남쪽 벼랑 끝에 앉아 어둠을 기다리던 날


혁명광장에 있는 잠수함 박물관에 100 루블(당시 1300원)을 내고 입장했다. 실제 군대에서 사용했던 잠수함을 개조하여 만든 작은 박물관이었다.


낮은 입구로 들어가면 잠수함 내부 여기저기 역사적인 의미를 설명하는 문구들이 적혀있었는데, 러시아어로만 적혀있는 통에 리자가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슬슬 체력이 떨어져 갔다.

 "리자! 우리 디저트 먹으러 가자."
 
우리는 굼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 안에는 블라디보스톡 도시를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는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다. 무려 아이스크림 위에 쿠키나 떡 같은 토핑을 마음대로 올려 먹을 수 있는 DIY아이스크림 가게,라고 신이 난 리자가 말했다. 나는 코코넛아이스크림에 쿠키와 버블 떡을, 리자는 요거트아이스크림에 떡과 과일을 올렸다.
 우리는 창가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에너지를 충전했다.




리자가 유치원으로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같은 버스를 탔고, 내가 먼저 집 앞 정류장에서 내렸다.


"곧 보자! 잘 다녀와!"




리자가 알려준 집 앞 과일 가게에서 복숭아를 한 바구니 사고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분명 10층에서 내리긴 했는데 루슬란과 리자와 함께 내렸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다른 집 문들이 3개나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다른 건물로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3개의 문들이 아주 낯설었다.

'어쩔 수 없지’


그중 쌀 한 톨 만큼이라도 더 익숙한 집 현관문을 붙잡고 무작정 열쇠를 넣었다. 제발 리자의 집이길 바랐다. 하지만 쌀 한 톨만큼의 낯익음은 그저 착각일 뿐이었고, 덕분에 러시아 노부부와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무모한 내 행동에도, '이즈비니째~’를 연신 내뱉으며 손을 모으는 아시아 여학생에게, 두 분은 그저 인자한 미소를 보여주셨다.
 
어쩌다 보니 여러 집을 전전한 후 드디어 집 문을 열었다. 다행히 루슬란이 집에 있지 않아, 이 민망한 상황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몸과 정신이 허기진 저녁이었다. 데운 샤슬릭에 계란후라이를 올리고, 가져온 빵과 스미따나를 함께 곁들여 식탁에 올렸다. 부엌 창문 밖으론 푸른 바다가 보였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일몰과 함께 마약 등대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과일을 씻어 가방에 넣은 후 나갈 채비를 했다. 지체 없이 바로 나왔어야 했지만 집에 들어온 루슬란과의 수다로 조금 늦게 출발하게 됐다. 루슬란은 서둘러 가야 노을을 볼 수 있을 거라 했다.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니 마약 등대 정류장에 도착했다.


 '어라, 구글 지도의 예상 시간은 1시간이었는데, 그렇다면...'


 정류장에서 바닷가까지 도보로만 30분이 걸렸다. 해가 빠른 속도로 나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뛰기 시작했다.


 거의 15분 만에 도착한 바다, 해수의 끝에는 이미 진한 붉은색 석양이 구름을  적시고 있었다. 마약 등대는 조금 더 걸어가야 볼 수 있었지만 내 발길은 석양 앞에서 멈춰 섰다.
 

손수건을 자갈 바닥에 깔고 앉았다. 노을이 붉은 카펫처럼 수면 위에 깔리니 구름과 어우러진 노을빛은 마치 경이로운 무대 같았다. 모두가 넋을 잃고 바라봤다. 이내 어두운 구름막이 무대를 가리니 관객들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쏟아냈다.

서서히 그 소리가 잦아들고 하나 둘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거기 그대로 앉아 빛의 끝자락을 응시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관객이 모두 사라진 후 시작된 비밀 무대를 보는 듯한 짜릿한 느낌이었다.
 

비록 마약등대와 석양을 함께 보진 못했지만 뒤늦게 어두워진 하늘 아래의 등대도 꽤나 멋졌다.

등대에서 조금 떨어진 절벽 바닥에 앉아, 완전한 어둠으로 뒤덮일 때까지 복숭아를 베어물며 파도 소리를 느꼈다. 종종 파도는 무섭게 들이치기도 하고 잔잔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아무렴 좋았다.

러시아 가장 남쪽 절벽 끝에 앉아, 낯선 공기, 낯선 소리와 함께 낯선 생각에 잠기는 것. 

너무나 소중하고 아까운 순간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수 많은 자극적인 일상에 익숙했다. 그러니 차분히 생각을 잇고 나를 정비하는 일이 아주 드물었다. 여행을 다니면서 종종 마주하는 아름다운 풍경은 그에 퍽 어울리는 생각들을 불러온다. 이러니 여행을 사랑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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