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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Jan 04. 2024

한국으로 조심히 돌아가 얘들아!

블라디보스톡 넷째 날,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작별 인사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레이니우스와 걷고 또 걷는 뚜벅이 관광 코스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부엌 식탁에 앉아계시던 리사 아주머니가 말을 걸어오셨다.

평소라면 마주 앉아 신나게 수다를 떨었을 텐데, 유난히 피곤한 오늘은 빠르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숙소 밖 테라스로 나갔다.


숙소에 도착한 첫 날 봐 둔 테라스였다. 나무 데크 위로 해먹이 매달려 있었다.

그곳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휴대폰에 블루투스 키보드를 연결하고 오늘의 기나긴 여정을 담아내던 중, 숙소로 돌아온 한국인 남매와 마주쳤다. 눈인사를 하고 마저 할 일을 하려는데, 여동생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혹시 쪽지 전달받으셨어요?"

"네? 무슨 쪽지요?"

어제 낮에 여동생과 부엌에서 잠시 간단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내가 외출한 사이, 남매는 숙소 주인에게 함께 맥주를 마시자는 쪽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그 쪽지는 받지 못했지만 우리는 결국 이렇게 마주쳤다.

남매는 옷을 갈아입고 이곳으로 다시 나오기로 약속한 후 숙소로 들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 남자 형제 연우가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테라스로 뛰어나왔다. 그리곤 내 연락처를 물어봤다. 번호를 주면 내가 메시지를 보내겠노라 말한 후 내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연우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한참을 화면을 응시했다.


"어..! 이거 띄어쓰기가 저절로... 너무 많이.... 되는데요!!!"

앗, 해먹에 앉아 있던 탓에 내 뱃살 밑에서 블루투스 키보드의 스페이스키가 처참히 짓눌리는 중이었다.  


둘 다 크-게 웃었다.




맥주를 따로 사놓지 않은 나는 클레버마트에서 맥주 한 캔과 함께 안주로 먹을 포도를 샀다.

연우가 짭짤한 감자칩 사진을 보냈기 때문이다. 역시 맥주 안주는 단짠이 정석이기에.


테라스에 앉아 건배를 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고향 이야기, 휴학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사는 이야기. 처음 만나 대화하는 사람들답지 않게, 몹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야기가 무르익을수록 공통점이 많이 보였고 유머 코드부터 관심사가 비슷한 것까지 마치 길게 이어온 인연처럼 느껴졌다.


연우는 연서를 업어 키웠다고 했다. 일리가 있는 것이, 이렇게 사이좋은 남매는 본 적이 없다. 연우는 연서를 자랑스러워했고 항상 다정하게 대했다. 사랑스러운 남매였다.

동갑인 연우는 운동을 좋아하고 왼손잡이이지만 어른들의 요구로 거진 양손잡이가 된 것 등 많은 부분이 나와 닮아있었다. 연우는 우리의 공통점을 찾는 것에 재미를 붙이다 못해 진짜 닮은 '점'을 찾기도 했다.


"네 팔에 있는 점이 왜 이렇게 익숙한가 했더니 나도 있어!"





내가 신촌 생활을 이야기하니 곧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어디 대학교 다니세요?"

"저는 연세대 다녀요."

"어!!!!!!!!"

 두 남매가 동시에 화들짝 놀랐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 왜요?"

"저는 서울대고 오빠는 고대예요!!!"

블라디보스톡에서 서울대 연대 고대가 모인 것이다. 신기한 인연이다.
우리는 더더욱 신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분명 다시 만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블라디보스톡SKY라는 귀여운 톡방도 만들었다. 우리가 내일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이 오늘의 피로를 이겨냈다. 우리는 새벽 2시쯤에야 헤어졌다.


"내일 배웅을 해주면 좋겠지만 나는 늦잠 잘게 분명하니 미리 작별인사 할게. 잘 가 얘들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침에 네 방으로 깨우러 갈 거야!.."
 




잠을 설쳤다.

발치에 쌓아둔 짐 때문에 자세가 불편해서 그랬을까?

연서와 연우가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였을까?

9시 반에 일어나기로 한 친구들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었다.


눈 비비며 샤워하러 나온 연우와 마주쳤다.

"웬일이야! 일어나 있네, "

"어~ 일찍 일어나서 아침도 먹었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연서는 머리를 감고 나왔다.
연서에게 딸기 요플레를 주고 차를 우려 줬다. 연서는 자꾸 챙겨주고 싶은 동생이다.
연우는 자꾸 홀대받는 느낌이라고 툴툴댔다.

둘은 분주히 나갈 채비를 하다가 말고 방에서 컵라면과 햇반이 든 봉지를 꺼내왔다.


"까먹을뻔했다! 우리가 먹으려고 산 건데 못 먹었어. 넌  긴 여행이니 더 필요할 것 같아"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마지막 점심은 뭐냐고 물었다.


“이번 여행에서 제일 맛있게 먹었던 오믈렛집을 가고 싶어.”


연서가 내게 같이 가자고 말했지만, 나는 교회에 가야 해서 같이 가려면 30분 안에 나가야 했다.


"나 때문에 서두를 필요 없어, 천천히 챙기고 둘이 맛있는 점심 먹고 한국 가~"

점심을 꼭 같이 먹고 말겠다는 연서.
부리나케 들어가서 짐을 쌌다.

"짐 다 챙겼어 언니!"





함께 아르바트거리에 있는 유명한 식당으로 갔다.

둘은 먹고 싶은 메뉴를 몽땅 시켰다.
시베리아 만두, 감자만두, 민트계란슾, 오므라이스, 계란프라이, 햄치즈블린,  둘은 음료, 나는 물.


남매는 내게 꼭 건강하게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언니 나는 다른 사람을 이렇게 걱정해 본 건 처음이야."


우린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작별인사를 했다.






그렇게 110일의 여행 동안, 귀하고 소중한 인연들을 신기할 정도로 많이, 그리고 깊게 만났다.

어쩌면 이어지지 않았을 우리가 그곳에서 만나 인생의 일부를 나눴다는 것.

모든 것이 선물 같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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