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14번째 도시, 베네치아의 아침이 밝았다.
머리맡 창문 아래로 바닷물이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 위해,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서 창밖을 내다봤다. 푸른 물 위로 두세 명의 사람을 태운 곤돌라가 지나가고, 맞은편 건물이 마치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 여행과는 다르게 늦장 부릴 여유가 없는 오늘은 빠르게 나갈 채비를 하고 숙소 밖으로 나섰다. 익숙지 않은 풍경과 이른 아침 흐린 날씨까지 더해져, 찬 몸이 살짝 긴장되는 듯했다.
부라노 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 그전까지 튼튼한 두 다리로 베네치아 본섬 구석구석을 거닐었다.
이탈리아어 발음으로 베네치아(Venezia), 영어 발음인 베니스(Venice)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곳은 수상도시의 대명사이다. 수많은 운하 사이로 촘촘한 물길이 나있어, 구도심은 도보 또는 배로만 이동해야 하는 재미있는 도시이다. 심지어 자전거를 타는 것도 허용되지 않으며, 파도에 의한 균열을 방지하기 위해 배의 속력도 제한되어 있다.
헌재 베네치아 대부분의 인구가 육지 쪽 신도시에 살고 있으며 주요 도시의 기능 또한 신도시로 이전되어, 바다 위 구도심은 관광의 기능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구도심에서도 여전히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리알토 다리 근처에는 신선한 해산물을 판매하는 수산시장이 열리는데, 그곳에서 강아지를 산책시키며 장을 보는 가족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수산 시장에서 만난 귀여운 강아지와의 5초 간의 아이컨택.
그리고 눈을 마주친 채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었다.
골목골목을 걷다 보면 일절 홍보하지 않는 전시 공간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대로변에 포스터를 붙이거나 입간판을 내걸 수 없으니, 나 같은 무계획 여행자는 그저 비좁을 골목길을 지나다 우연히 고개를 돌려 문 틈 사이로 전시관을 발견하는 수밖에 없다.
관광 도시답게 간식거리를 파는 가게들도 아주 많다. 아무 곳이나 들어가도 트립어드바이저 탑 랭킹에 등재된 베이커리 었다. 대기줄이 없는 빵집을 발견하고 피스타치오 미니 크루아상을 샀다. 고소한 피스타치오 크림과 버터향 가득한 크루아상의 조화가 완벽했다. 옷 위로 떨어지는 크루아상 조각들을 털어내며, 한국으로 돌아갈 때 피스타치오 스프레드를 꼭 사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베네치아를 산책할수록 이 도시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이런 곳에 어떻게 도시가 만들어진 것일까?
5세기 여러 이민족들의 약탈을 피해 베네치아 석호의 섬들로 모인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로 인해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흙 위에 대도시를 건설할 수 있었을까?
단단한 땅이 아닌 진흙으로 이루어진 베네치아에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기 위한 방법은 나무 말뚝이었다. 진흙 깊숙이 단단한 지반에 닿을 정도로 나무 말뚝을 여럿 박아 단단한 토대를 만든 다음, 그 위에 벽돌과 돌을 이용해 지반의 변형에도 무너지지 않는 유연한 집을 지었다. (베네치아 유명 건축물인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 아래에는 말뚝 110만 개가 박혀있다.)
베네치아는 섬의 개념을 다르게 해석하게 해 줬다. 베네치아는 고립된 섬이 아닌 사방으로 열린 기회의 도시였다. 초기 베네치아의 거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항해술과 선박 기술을 연마했고 해외로의 교역을 통해 국력을 키워갔다. 대도시를 건설 이후 500년, 중세 베네치아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국가가 되었다.
초기 베네치아에 정착한 사람들의 문제 해결 과정과 국력 확장을 위한 노력이 담긴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 태도와 전략에 큰 영감을 줬다. 물길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본 감탄스러운 풍경과 더불어 단단한 투지의 역사를 가진 베네치아는 내게 짧지만 강한 인상을 줬다.
언젠가 다시 이 골목을 산책하며 천천히 도시를 음미하는 시간을 보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