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여행친구를 보내준 날
작은 페리를 타고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건너왔다. 아침 일찍 서두른 덕에 붐비지 않는 중앙역에서 이곳저곳을 여유롭게 구경했다. 마트에 들러 간단히 먹을 샌드위치와 함께 '예쁜’ 물을 한 병 샀다. 역 한 편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지나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오늘의 일정을 빠르게 세워 본다.
넓고 깨끗한 도서관에는 책을 읽는 어린이들과 랩탑을 앞에 두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쳥년들이 몇몇 앉아 있었다. 기능에 중심을 둔 것뿐만 아니라 층과의 연걸, 조명 배치, 이용객의 어우러짐까지 고려하여 설계된 듯한 감각적인 공간이었다. 한국에 있는 공공 도서관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나는 주로 도서관 같은 공공시설의 규모와 설계 감수성을 통해, 어느 도시의 복지 수준을 짐작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문화 예술 공간이 더 많아지고 많은 고민을 통해 설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이 많은 잡지를 몇 번 뒤적이다가 다른 층으로 올라가 본다.
오늘로 딱 삼 개월. 어느 곳이든 데려다줬던 내 여행 메이트.
원래 이 러닝화는 곱게 헬스장에서만 신던 친구였지만, 가볍다는 이유로 내 여행에 끌려오게 됐다. 어느 때는 내 족저근막염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 당해 버려질 위기에 처했었지만 함께 한 의리를 핑계로 지금까지 꿋꿋하게 신어왔다. (족저근막염으로 오래 머물던 프라하에서, 내 안위를 걱정하던 이보가 만병의 근원으로 내 신발을 지목했다.)
여행 중 비 오는 날이 잦아 '아쿠아'슈즈 수준으로 흠뻑 젖을 때가 많았지만, 한 밤이면 싸-악 말라 아침엔 보송한 착용감을 선물해 주던 고마운 친구이다.
도서관에서는 고흐전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마도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일 테지만, 이용객이 없는 틈에 친절한 직원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캔버스 하나를 차지하게 됐다.
양말바람으로 캔버스 앞에 서서 꼬질 해진 신발을 그렸다.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이다. 10년 전 그림 실력에서 크게 성장하지 못 한 듯한 그림이지만 내 여행 메이트에 대한 애정을 담은 마지막 작별 의식, 그 비슷한 것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 덜컥 새로운 신발을 한 켤레 장만했다.
지금까지 지나온 모든 도시를 통틀어 가장 으쓱한 밤거리를 꼽자면 암스테르담의 밤거리라고 할 수 있다.
밤이 되면 느끼한 마리화나 냄새와 빨간 조명 속에서 나를 빤히 응시하는 언니들의 눈빛에,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지곤 했다.
그럼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암스테르담.
붐비는 골목을 지나 센느집으로 향하는 동안은 발걸음이 퍽 느려진다.
빗물 덮인 도로 위 조용한 물결 위로 은은한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번지는 풍경에 가슴이 벅차곤 했다.
그렇게 촉촉한 공기 속을 천천히 걷다 보면 암스테르담에서의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