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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영잉 Aug 27. 2021

냄새가 진득한 옷들은 제주 햇볕 아래에 두어요

제주 곽지 생활 이야기, 제주 주민과의 저녁과 육지 청년과의 만남

어젯밤 잠시 튀김집에 들른 탓에, 마치 내가 기름에 다이빙한 것 마냥 기름 냄새가 옷에 진득이도 뱄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안고 나가 쨍쨍한 마당에 척- 걸어놓았다.


스타일러가 고온 증기 분사와 고진동을 통해 기름 분자를 섬유에서 분리시키는 원리라면, 이건 그 메커니즘의 무척 안락한 버전인 듯하다.


기름 냄새는 이내 곧 사라지고 보송한 볕 냄새만 남았다.




퇴근 후, 바로 옆 동네에서 공중보건의사 생활을 하고 있는 제주살이 2년 차 j를 만났다.



**제주살이 2년 차 공보의 이야기**

j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낸 동아리 선배이다. 그 바쁜 공부를 하면서도 동아리 부회장으로 일했고 졸업 때까지도 행사에 가면 꼭 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참 성실하면서도 하고 싶은 건 다 해야하는, 재밌는 친구이다.

의사면허를 받자마자 제주살이를 해야겠다며 제주 공보의를 자원했다. 다들 서울에 남고 싶어 안달이라던데, 역시 j답다. 그렇게 서울 토박이 j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동네에서 한적한 보건 의사 생활을 하고 있다.



**다시 곽지 이야기**

j는 심심한 덕분에 이것저것 하고팠던 것들을 '도장깨기'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스쿠버다이빙을 배워 거진 해녀가 되어있었고, 제주로 떠나기 전부터 맥주를 직접 만들어 마실거라 노래를 부르던 맥주광 j는 결국 수제 맥주 수업에 푹 빠져 있었다.


어느 쌀국수집에서 짜조와 쌀국수를 들이키며 서로의 근황을 열성적으로 업데이트했다. 이런저런 수다를 마치고 j는 뚜벅이인 나를 친히 곽지 집 앞에 내려주고는 트렁크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건내 받은 것은 직접 만든 맥주 두 병이었다. 각 수제 맥주의 풍미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더니 마지막 한 마디를 붙였다.


'사실 나도 안 마셔봐서 몰라, 강사님이 그렇대'


본채의 유일한 냉장고는 꽃 냉장고였다. 꽃과 맥주라니,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면서도 기분 좋은 장면이었다. 잘 준비를 마치고 별채에서 작가님과 마주 앉아 망고향이 나는 상큼한 맥주에 김치전을 부쳐먹었다. 오~ 제법이었다. 밖에서 파는 수제 맥주보다 더 깔끔하고 청량한 맛에 감탄을 하며 j에게 카톡을 남겼다.





금요일 휴가를 냈다. 그래도 제주에 왔는데 평일 온종일 노트북 앞에 앉아, 일 할 순 없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뛰기로 했다. 운동의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 지난번 작가님이 간식으로 내민 찐빵이 너무 맛있어서 꼭 한 아름 다시 사서 나눠먹고 싶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찐빵집은 동네에서 아주 유명한 골목 맛집이었고 아쉽게도 찐빵이 아닌 빼빼로를 사들고 집으로 들어가게 됐다. 어쩐지,, 작가님이 서둘러 아침을 사러 가신 이유가 있었다.



어젯밤, 강릉 여행 중 친해진 낭만조종사 y에게 전화가 왔다.


"동상! 제주 살이 잘 하고 있어? (중략) 아끼는 후배가 4년 만에 첫 휴가를 받았는데 혼자 제주 여행을 간다네? 민영이랑 통하는 게 많아서 재밌을 것 같아! 둘이 만나서 밥이나 한 끼 할래?"

"오 재밌겠는데요? 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 나는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친구 I는 그렇게 점심 즈음 곽지집 앞에 도착했다.



**4년 만에 첫 휴가를 나온 I 이야기**

휴가를 마음대로 못쓴다니?? 4년 만에 처음이라니????

전투대대에 있는 내내 휴가의 '휴'자도 못 꺼내고 바쁘게 살아온 I는 이제야 남이 운전하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오게 됐다고 했다. 평소 일도 여행도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하는 것을 즐기지만 이번 휴가는 다르다고 했다.


"이번엔 철저한 무계획을 계획해봤어, 숙소도 일정도 모두"

"이런 소중한 무계획 휴가에 '나'와 노는 계획을 끼워주어서 고맙다야!"     



**다시 애월 이야기**

우리는 점심으로 제주 음식 몸국과 고기국수를 먹고, 애월을 여행했다.

몸국과 고기국수 in 임순이네
오름에서 산책 중인 말들



I와 귤밭에서 귤을 따고 있는데, 작가님께 연락이 왔다.


'동네 친구들하고 군고구마 구워 먹을 건데 어디야!'

'친구랑 귤 따러 왔는데, 같이 가도 되나요?'

'어여 와'


마당 한가운데 까만 현무암으로 둘러싼 작은 구덩이에서 작가님이 손수 팬 나무 상자 조각이 타들어가고, 연기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는 동안 은박지에 싸인 고구마들은 천천히 익어갔다.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제주에선 귤을 이렇게도 먹는 다더라'하며 따온 귤도 익어가는 고구마 곁에 함께 두었다. 뜨겁다못해 발화점에 다달은 듯한 귤을 건져올려, 껍질 한번 귓볼 한번을 번갈아 잡아가며 기어코 뜨듯달콤해진 과육을 입에 넣었다.


y의 말이 맞았다. I와 나는 비슷한 점이 참 많아, 신이 나 대화할 수 있었고,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오래 만난 사이인 양 몹시 자연스럽고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제주의 풍경과 따뜻한 이곳의 사람들이, 조금은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 오늘의 만남을 자연스레 매꾸어 준 것은 아니었을까?












#애월바다 #곽지해변 #제주몸국 #제주고기국수 #귤따기 #군고구마 #수제맥주 #제주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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