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네가 한 게 뭐가 있냐” 이후 내가 멈춘 것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졌다. 억울함보다 먼저 찾아온 건 무력감이었다.
설명해도 닿지 않는 벽을 이미 여러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한 게 뭐가 있냐.” 그 문장은 내가 그간 해온 모든 일을 지워버리는 말이었고,
동시에 앞으로의 내 노력도 결코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예고였다.
나는 내 명의로 대출을 받아 그의 빚을 상환을 도왔고, 아이를 맡기고 식당 일을 시작했다.
낮의 수입으로 부족해 저녁에도 일터로 나갔다. 카드값이 모자라면 잠을 줄여서라도 어떻게든 채웠다.
하지만 그 모든 분투는 그에게 ‘한 일’로 계산되지 않았다. 그는 나와 다른 계산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를 벌어왔느냐보다 얼마나 다정했느냐였다. 내가 웃지 않으면 '문제'가 되었고, 지친 내 말투가 차가워지면 '갈등'이 시작됐다.
그는 나를 향해 드디어 “왜 이렇게 무례하냐”고 물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 사람에게 진짜 위기는 '생활의 붕괴'가 아니라 '자존심의 손상'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멈췄다. 설명하는 걸 멈췄고, 설득하는 걸 멈췄고, 이해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았다.
대신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과 내가 더 이상 감당하지 않기로 한 것.
나는 더 이상 상황을 대신 책임지면서 태도까지 관리하지 않기로 했다. 생활을 메우는 사람에게
늘 다정하길 요구하는 구조는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집에 있지만 다른 속도로 살고 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식당일을 하며 생존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그는 주식모니터 앞에서 설명을 기준으로 움직인다.
이 차이는 대화로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가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버텨왔을 뿐이다.
나를 증명해야 할 대상은 오직, 이 시간을 견뎌내고 있는 나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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