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것
33년. 강산이 세 번 변하는 동안 내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집이 아니라 바로 이 낡은 책상 앞이었다. 퇴직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자리를 정리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디고 고된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짐 정리라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서류는 폐기하고, 쓸만한 집기들은 상자에 담고, 서랍을 비우면 그만인 일이라고. 하지만 막상 서랍 깊숙한 곳에 손을 대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지금 비우고 있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내 청춘과 중년을 통째로 관통했던 시간과 감정의 덩어리라는 것을.
내 책상은 말이 없었지만, 지난 세월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서랍을 열 때마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함께 잊고 있었던 풍경들이 쏟아져 나왔다. 밤늦게까지 홀로 남아 캐비닛의 그림자를 벗 삼아 기안문을 작성하던 날의 고독함,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누를 때마다 몰래 한숨을 삼키던 오후,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시작했던 수많은 아침까지. 한 장 한 장 빛바랜 서류를 넘길 때마다 그 시절의 감정들이 손끝에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이미 법적 효력을 잃은 오래된 문서들 사이에는 그때의 팽팽했던 긴장과 조급함, 그리고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속마음들이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정리하다 보니 의외로 버리기 쉬운 것들이 많았다. 유행이 지난 행정 매뉴얼, 다시는 펼쳐볼 일 없는 연도별 통계 자료, 잉크가 말라붙어 더는 나오지 않는 볼펜들. ‘언젠가 쓸지도 몰라’ 혹은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되겠지’라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차마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과감히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며 나는 새삼 자각했다. 우리는 그것들이 정말 필요해서가 아니라, 단지 내 곁에 오래 머물렀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익숙하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것들을 움켜쥐고 살아가는지를. 낡은 볼펜 몇 자루를 버리는 것만으로도 서랍은 눈에 띄게 넓어졌다. 내 마음의 서랍도 이처럼 단순하게 비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끝내 손에서 놓이지 않는 것들이 발목을 잡았다. 동료가 업무 중에 급하게 갈겨 적어준 따뜻한 응원의 메모 한 장, 유독 치열하게 살았던 해의 손때 묻은 다이어리, 그리고 내가 이 조직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소소한 기록들. 그것들은 단순한 종잇조각이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성실히 그 자리를 지켜왔는지, 한 사람의 공직자로서,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내 인생의 화석이었다. 그것들은 내 시간과 노력이 빚어낸 흔적이었기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중히 갈무리하여 마음의 상자에 담기로 했다.
책상을 비우는 과정은 나에게 '선택'의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과거의 나를 부정하거나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에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기꺼이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 서운함, 미련, ‘그때 조금 더 잘했더라면’ 하는 부질없는 후회들은 이 낡은 책상과 함께 이곳에 남겨두기로 했다. 그것들은 과거의 나에게 속한 것이지, 미래의 나까지 데려갈 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책임을 다해온 시간에 대한 자부심과 33년을 무사히 완주했다는 안도감, 그리고 사람들과 나누었던 따뜻한 온기만은 가방 속에 챙겨 넣었다.
모든 정리가 끝난 후, 텅 빈 책상을 마주하고 섰다. 30년 전 처음 발령받아 앉았을 때보다 책상이 훨씬 작아 보였다. 아니, 어쩌면 그 책상이 작아진 것이 아니라 그 세월만큼 내 마음의 그릇이 조금 더 커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텅 빈 책상 위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드리워졌다. 이 정리는 단순히 직장을 떠나기 위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인생 2막을 조금 더 가볍고 자유롭게 살기 위한, 내 생애 가장 엄숙하고도 다정한 예습이었다.
가볍게 떠난다는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나에게 맞지 않는 늙은 짐을 내려놓고, 나를 정말 나답게 만드는 것들만 추려 품고 가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서랍을 닫으며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상실감보다, 이제는 비워진 만큼 채울 수 있다는 여유가 마음속에 잔잔히 퍼졌다. 그 빈자리 위로, 다음 장의 삶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나는 이제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이 문을 나설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