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라먹는 맛, 교통편
나라 간 이동을 비행기로만 해 본 고심이는 여러 선택지가 있다는 게 반가웠다. 비행기로만 여섯 나라를 이동한다면 얼마나 번거롭고 재미없겠는가. 다만 이들 모두 미리 예약해야 한다는 건 골치 아팠다. 그래도 이 과정이 잘 안되면 미련 없는 나라에 더 머무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막차를 놓쳐 마음 없는 연인과 하루를 더 보내는 것처럼. 집중 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다음 장소에서 기다릴 새 연인을 위해.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벨기에와 네덜란드만 가까이 붙어 있을 뿐 다른 나라들은 생각보다 멀고 루트도 복잡하다. 네덜란드에서 덴마크로 가려면 독일을 지나야 하고, 덴마크에서 노르웨이로 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한다.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는 붙어 있지만 고심이네가 가려는 건 각 나라의 수도이고 그 수도들끼리 붙어 있는 건 또 아니라, 무턱대고 육로로만 이동할 수는 없다. 땅이냐 하늘이냐 바다냐를 놓고 요모조모 따져봐야 한다. 누가 예약해 주면 ‘골라먹는 맛’이 되겠지만 내가 해야 되면 ‘골고루 골칫거리’가 된다.
벨기에-네덜란드 (브뤼셀-암스테르담)
오래 전 같은 나라이기도 했던 두 나라는 딱 붙어 있어서, 당연히 기차가 편하다. 버스는 싸지만 시간이 배로 걸리고, 비행기는 공항 수속을 포함하면 기차와 비슷한 시간이 소요되는데 비용이 3배 이상이다.
기차는 벨기에 브뤼셀 중앙역에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으로 바로 간다. 대도시의 중앙역은 관광지 접근성이 뛰어나니 더 바랄 게 없다. 2~3시간 정도 느긋하게 창밖 경치를 보다 보면 금세 국경을 지난다. 흔히 말하는 ‘유럽은 기차 여행이지’에 딱 맞다. 그래서 유로스타 홈페이지(www.eurostar.com)에서 기차로 예매했다. 벨기에는 짧은 일정이었으므로 충분히 관광을 하고 떠나기 위해 저녁 기차로 예매했다.
네덜란드-덴마크 (암스테르담-코펜하겐)
이 두 나라는 이웃해 있지 않다. 중간에 독일이 있다. 육로로 간다면, 기차든 버스든 독일을 거쳐야 한다. 가장 빠른 기차도 10시간 넘게 걸리고 최소 한 번은 갈아타야 한다. 버스는 기차보다 더 걸리는데 요금은 싸다. 코펜하겐은 덴마크에서 가장 큰 섬인 시일란섬에 위치한다.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뜻이다. 다행히 긴 대교가 놓여 있어 배로 갈아탈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이동만 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쓸 수는 없다. 결국 비행기가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다.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출발, 코펜하겐 카스트럽 공항 도착, 1시간 20분 소요, non stop. 운 좋은 저가항공을 만나 기차와 비슷한 가격으로 예약 완료했다.
스웨덴-핀란드(스톡홀름-헬싱키)
이동 순서대로라면 제일 마지막에 예약해야 하지만 먼저 진행했다. 이미 교통편을 생각해 두었기 때문이다.
틈틈이 여행 후기를 찾아봤다. 스웨덴-핀란드 구간은 무조건 크루즈, 라는 의견이 많았다. 크루즈라면 대형 선박 아닌가. 몇 주일 혹은 몇 달씩 크루즈 여행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겨우 옆 나라에 크루즈?
사실 스톡홀름-헬싱키 이동은 비행기가 가장 빠르다. 탑승 시간이 1시간 내외다. 기차는 한 번에 가는 게 없다. 스톡홀름과 헬싱키 사이에도 바다가 있어서 배로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다, 번거로운 데다가 시간 연결도 매끄럽지 못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크루즈를 이용해 두 나라를 오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에 타서 다음 날 오전에 내리는 일정이다. 그러니까 하룻밤을 배에서 자는 것이다. 오호, 배에서 잔다는 사실에 구미가 당겼다. 숙박비도 절약하고, 자면서 이동하니까 이동 시간도 절약하고. 항공료와 헬싱키 1박 숙박비를 계산해 보니 크루즈가 훨씬 효율적이었다. 사실 비행기는 가능하면 안 타고 싶었다. 코딱지만큼 비행하려고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공항 구경도 한두 번이지.
크루즈는 아주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갇혀 있는 다른 교통수단과는 달리 리조트처럼 생긴 배에서 여유롭게 즐기며 여행한다. 즉 이동 수단이면서 숙박 수단이면서 관광지인 셈이다. ‘급하게 비즈니스 미팅에 가는 길이신가요? 아니라면 스톡홀름-헬싱키는 크루즈가 정답입니다’라는 광고문구가 딱 어울린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배만의 독특한 공간과 분위기를 느낄 생각을 하니 설렜다. 그리고 바다... 손바닥만한 바다가 아니라 진짜 대따 넓은 바다를, 저녁 바다, 밤 바다, 새벽 바다까지 볼 생각을 하니...
찾아보니 크루즈는 바이킹라인(Viking Line)과 실야라인(Silja Line)이라는 두 선박회사에서 각각 하루 1회씩 운항한다. 여름 시즌이 특히 인기이며, 객실 중에서 창이 있는 방은 훨씬 일찍 마감된다고 한다. 창이 있는 방? 바다 위에서 잠드는 것도 설레는데 아침에 눈 뜨면 머리맡에 바다가 있는 거야? 천천히 움직이는 바다가? ‘창이 있는 방’은 ‘크루즈 여행’만큼이나 구미가 당겼다. 하지만 다들 몇 달 전부터 예약한다는데 겨우 3주 남은 시점에 방이 있을까.
고심이는 부리나케 실야 라인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날짜로 검색하니 방들이 몇 개 떴다. sea view standard cabin for 3 persons. 있었다 방이. 그것도 sea view로! (물론 창이 없는 방보다 비쌌다.) 흠, 배 위의 방은 캐빈이라고 하는군.
바다의 방은 뭍에서의 방과는 차원이 다르게 좁았다. 사진으로 보니 4명까지 묵는 캐빈인데, 침대 2개는 바닥에 2개는 벽에 매달려 있었다. 침대 사이를 지날 때 한 사람은 침대 위로 올라가 있어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작은 창으로 보이는 손바닥만한 바다 사진이 순간 그 좁은 공간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바로 예약을 클릭하려다 가만, 한국 대행사가 있다고 본 것 같은데... 가격차가 크지 않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소통이 편한 대행사 예약도 고려하고 싶었다. 수수료가 있으니까 조금 더 비싸겠지? 그런데 웬걸, 20유로 더 쌌다. 왜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취소도 가능하다 하니 일단 예약을 했다. 나중에 대행사 사장님과 통화할 일이 있어 여쭤보니, 한국에서 실야라인 크루즈 대행은 사장님 회사가 유일하고 고심이가 예약한 게 마지막 캐빈이었으며, 가격 결정 방식은 호텔과 항공편 대행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미리 일정량을 합의된 가격에 확보해 두는 건데, 부지런한 사장님이 좋은 가격에 물량을 확보하셨던 모양이다.
좋은 가격에 캐빈을 예약한 기념으로 저녁 선상 뷔페도 예약했다.(응?) 그간 걸어 다니느라 고생할 텐데 배에 있을 동안만큼은 충분한 식사를 하고 싶었다.(본심) 여행의 즐거움은 몸의 즐거움에서 오며, 몸의 즐거움은 위장의 즐거움에서 오니까.(신념)
크루즈를 예약하고 나니 실실 웃음이 났다. 어딘가 근사한 것을 숨겨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가장 하고 싶은 건 갑판에 나가서 미친 듯한 바닷바람을 맞아보고 싶다. 세차게 부는 바람 속에 하염없이 서 있어 보고 싶다.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가 되고 싶은 거야?)
덴마크-노르웨이(코펜하겐-오슬로)
어라, 코펜하겐에서 오슬로로 가는 교통편도 스톡홀름-헬싱키와 사정이 비슷했다. 비행기가 가장 시간이 짧고, 기차는 직행이 없으며 버스는 10시간 정도 걸린다. 요금은 비행기와 기차가 비슷하고 버스가 저렴하다. 그런데 이 구간에도 크루즈가 있었던 것이다. 역시 1박2일 코스. 사실 크루즈를 두 번까지 탈 생각은 없었는데 시간과 비용상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라 어쩔 수 없겠다. (이러다 계속 크루즈 여행?)
이곳 크루즈 회사는 DFDS Seaways가 유일했고, 한국대행사는 없었다. 홈페이지로 바로 들어갔다. 그런데 sea view 방이 없었다. 혹시 크루즈마다 구조가 달라서 원래 없는 건가 싶어 찾아보니 이미 다 판매된 것이다. 이 구간도 꽤 인기 있는 모양이다. 할 수 없이 창이 없는 캐빈으로 예약했다. 그런데 실야라인보다 30유로나 더 비쌌다! 실야라인보다 작고 시설도 낡아 보이는데... 대행사 덕을 본 것도 있겠지만, 성수기의 예약은 이렇게 들쭉날쭉인 모양이다.
창도 없는 방을 이 가격에 하려니 실야라인 때만큼 신나지는 않았다. 바다 위에 떠 있는데, 밖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니 숨이 막힐 것 같기도 했다. 밖에서 실컷 바다를 보다가 잘 때만 방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예약하고 나니 바닷바람이 불 듯 슬슬 기분이 좋아졌다.
노르웨이-스웨덴 (오슬로-스톡홀름)
이 구간은 크루즈가 없다. (다행이다.) 시간만 따지면 역시 비행기가 제일 간편하다. 비행기는 수속 시간 포함 3시간, 기차는 5시간, 버스는 8시간.
이제 딱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기차가 5시간밖에 안 걸린다니 더 고민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직행이라니. 오슬로 중앙역에서 스톡홀름 중앙역으로 바로 간다. 벨기에에서 네덜란드 갈 때도 기차를 타지만 살짝 부족한 감이 있었다. 5시간 정도는 타 줘야 ‘역시 유럽은 기차 여행이지’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구간은 무려 5시간 30분이나 탄다. 쾌적한 기차에 앉아서 커피를 홀짝거리다 보면 창밖으로 멋진 풍경들이 지나갈 것이다. 열심히 걸어야 볼 수 있던 풍경을 앉아서 수다 떨며 볼 수 있다니, 이런 게 ‘비포 선 라이즈’ 아닌가. 아니다. 에단 호크가 없다. 아니다. 줄리 델피도 없다. 어쨌든 기차 예약 완료.
교통 편 예약을 하고 나니 점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스키폴 공항, 카스트럽 공항... 처음에는 발음도 안되던 이름이 동네 강아지 부르듯 친숙해졌다. 여행이란 그런 건가. 낯선 것들을 만나 천천히 스며들고 어느새 헤어지기 싫어지는... 비행기-기차-비행기, 배-기차-배, 다시 비행기로 이어지는 여정. 통수들이 어릴 때 보던 책 중에서 ‘탈 것’이란 제목의 그림책이 있었다. 그 중 한 페이지에 나오는 것을 이번 여행에서 몽땅 타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