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여자가 20대 남자에게 말 거는 법/번외편1

어떤 보험의 추억

by 리영

((이 글은 내용상 6편과 7편 사이에 위치합니다.))


여행자 보험은 미리 알아봐 두고, 출발 하루 전까지만 가입하면 된다.

고심이네는 항목별로 조절이 가능한 상품으로 골랐다. 가령 상해 질병 등은 무난하게, 항공기 지연 보상은 낮게, 배상책임 한도는 높게 잡아서, 1인당 2만원 미만의 요금으로 맞추었다.(무사고시 일정 부분을 환급해 주기도 하는 상품이다.)

배상책임은 여행 중 내가 타인에게 끼친 손해를 배상해 주는 것이다. 전시회 물건을 파손하거나 호텔 및 다른 건물에 손상을 입히거나 다른 사람과 충돌이 일어나 상해를 입히거나 하는 경우 말이다. 물론 건전(?)하게 다니면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 고심이가 이 부분을 높게 책정한 것은 보험에 대한 어떤 살벌(?)하고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잠시 캐나다에 살 때다. 방학을 맞아 어린 통수들을 데리고 미국 여행을 시작했다. 자동차를 몰고 가는 긴 여행이었으므로 그날그날 가벼운 빨래들은 숙소에서 했다.

그날도 옷을 빨아서 호텔 벽에 못처럼 튀어나온 ‘옷걸이’에 걸어 두었다. 위치가 높아 의자를 밟고 올라가면서 이 호텔은 옷걸이가 좀 높이 있네,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옷걸이에서 옷을 내리려는 순간... 촤아악 하고 세찬 물줄기가 고심이를 향해 쏟아졌다. 피할 새도 없이 마구 퍼부었다. 고심이가 비틀대자 놀란 남편이 올라와서 그 ‘옷걸이’라 생각한 것의 앞부분을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아무 그릇이나 가져와!

고심이는 욕실로 뛰어갔다. 작은 바가지가 있었다. 물은 남편의 손을 뚫고 계속 쏟아져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기세였다. 바가지로 물을 받아서 욕조에 버렸다. 턱도 없었다. 휴지통을 바닥에 쏟아 버리고 바가지와 번갈아가며 물을 받았다.

카펫 위로 금세 물이 차올랐다. 그때 잠에서 깬 어린 통수들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소나기 같은 물줄기를 맞았다. 처음에는 신난 듯 웃으려던 통수들도 엄마 아빠의 몰골을 보더니 겁먹고 주섬주섬 내려왔다. 그리고 물을 나르는 걸 거들었다. 그 사이 고심이는 프런트로 뛰어 내려갔다. 스프링클러가 터졌어요! 도와주세요!!


물에 흠뻑 젖은 고심이를 아래위로 보던 프런트 직원이, 자신들은 맘대로 중앙 수도관을 잠글 수가 없다, 소방관이 와야 한다,는 아주 침착한 답변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침착하게 수화기를 들고 침착하게 번호를 눌러 침착하게 설명을 하며 소방관을 호출했다. 그런 후 고심이에게 아마 이른 시간이라 오는 데 시간이 걸릴 거라고 침착하게 설명해 주었다.

고심이는 침착할 수 없었다. 미친 듯이 다시 뛰어 올라가 물을 받아 날랐다.

바닥의 물은 계속 차올랐다. 그런데 저 직원은 왜 남의 일 보듯 하는 거지? 보통은 올라와서 함께 처리하려고 애쓰지 않나? 기다리는 동안 큰 양동이 같은 걸로 같이 물을 받아내면 그래도 건물에 피해가 덜 갈 텐데... 이것이 진정 none of my business 정신인가. 아무리 미국이라 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 경우는 ‘내가 남이가’ 정신이 훨씬 타당해 보였다.

물과 싸우느라 모두가 지쳤을 때쯤 물줄기가 딱 멈췄다. 소방관이 도착한 것이다.

소방관 한 명이 올라오더니 와우, 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는 고심이를 향해, ‘이 물 정말 지저분한데, 옴팡 젖으셨네요. 옆방을 비워뒀으니 가서 얼른 샤워하세요,’ 했다. 이 와중에 친절이라니, 하지만 고맙다는 말이 잘 안 나왔다. 이 큰 사고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심이가 뒤집어쓴 건 더러운 물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걱정과 불안이었다.

그 사이 매니저가 출근을 했고 얘기를 나누었다. 단순히 카펫을 걷어 말리는 것으로 안 끝날 수 있다, 만약 바닥 자체에 습기가 완전히 스며든 상태면 1층 천장에 문제가 생기므로(고심이네는 2층이었다) 2층 전체 바닥 공사를 해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얼마 전 다른 지점에서 바닥 공사를 했는데 비용이 30-40만 달러 들었다, 여기는 더 큰 건물이니 50만 달러(6억5천) 들 수도 있다, 당신 보험회사에 빨리 연락을 해라...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남기고 주섬주섬 차를 탔다. 막 여행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스프링클러가 벽에 붙어 있으리라고 짐작이나 했겠는가. 옷을 걸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내릴 때 센서가 건드려진 모양이었다. 무슨 표시라도 해 놓지. 그런 점에서 호텔 측에서 고지를 소홀히 한 점은 없었는가... 하지 못한 말들이 속에서 와글거렸다. 집으로 가고 싶었다. 한국의 집으로.

그리고 이 땅에 고심이네 보험회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겨우 자동차보험만 들었는데. 자동차보험은 토론토의 한국인 2세가 하는 대행사에서 가입을 했다. 문제가 생기면 아무래도 디테일하게 소통하기 쉬울 듯해서.

그나마 알아볼 데는 거기밖에 없었다. 자동차 사고는 아니지만 동종업계이니 고심이보다는 더 잘 알 것이다.

그러니 더욱 전화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전화했다가 엄청난 액수의 배상을 해야 하는 것이 분명해지면, 도대체 어떻게 여행을 한단 말인가. 차라리 여행이 끝난 후 맞닥뜨리면 최소 추억이라도 남지 않겠는가. 남지 않는다. 고심이는 간이 작아서 불안한 채 여행을 했다간 추억이 아니라 악몽만 남을 것이다.

전화를 걸었다.

“스프링클러요? 어쩌다...”

-옷걸이인 줄 알고...

“아 가끔 그런 경우가 있죠. 옛날 건물에.”

옛날에는 배관 문제 때문에 스프링클러를 천장에 설치하지 못하고 벽에 설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 호텔은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한 거고, 스프링클러 시스템은 옛날 식 그대로 둔 거다.

“거기 아무런 주의 표시 없었어요?”

-없었어요. 사실 요즘 누가 천장이 아니라 벽에 스프링클러가 있다고 생각하겠어요. 투숙객이 주의할 수 있도록 안내라도 붙여 놓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호텔 측에도 약간의 책임이 있는 건 아닌가요. 정말 옷걸이처럼 생겨가지고...

못다 한 말이 쏟아졌다.

“일단 여행부터 하세요. 저희 사무실 번호 주시고. 연락이 오면 그때 전화 드릴게요.”

아니 사람들은 왜 이런가. 일단 여행부터 하라니. 아까 소방관이 일단 샤워부터 하라는 말과 뭐가 다른가. 이 엄청난 일이 다 남의 일이라 우습게 보인단 말인가.

그랬는데 대행사 직원이 덧붙였다.

“고객님이 드신 보험으로는 one million dollar까진 커버가 돼요. 그 이상은 힘들겠지만, 기다려 보죠.”

-네? 얼마요?

“one million dollar요. 다만 개인 부담금이 맥시멈 ten thousand dollar 있어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머릿속에 one million dollar를 계산해 보았다. 약 13억이다.(당시 환율 1300원대) one hundred thousand dollar도 아니고 million 이라니. 몇 번이고 되물어 확인했다.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최악의 경우 개인부담금 130만원 정도만 지불하면 된다는 건가? 이럴 수가. 억 단위의 공사비를 걱정하던 사람에게 130만원은 정말 귀여운 금액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런데 고심이가 언제 그런 보험에 들었단 말인가. 희미하게 기억이 올라왔다.

캐나다에서는 자동차보험을 들 때 소액만 추가하면 뭔가 다른 보험 하나를 같이 들 수 있다고 했다. 금액이 적기도 했고, 아이들이 일으키는 자잘한 사고에도 도움이 된다고 해서 그렇게 가입했다. 그것이 ‘개인책임보험’이었다. 정말 소액으로 기억하는데 무려 13억원의 손해를 커버해 준다니.


어린 통수들은 뒷좌석에서 곯아떨어졌고, 고심이가 통화를 하는 동안 남편은 느리게 차를 몰았다. 그 느리고 고요한 순간에 대행사 직원과 얘기를 나누고 있노라니, 그것 자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걱정과 불안 때문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는데... 그저 습관적으로 가입했던 보험의 효용을 생생하게 절감한 순간이었다. 사고 후라면 '보상'의 기능이었겠지만, 그 전까지는 정말 ‘안심'하게 해 주는 기능 말이다.


차는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한참 후 남편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물줄기를 막고 있을 때, 그 네덜란드 소년이 된 기분이었어...'

네덜란드 소년? 밤새 손으로 댐의 구멍을 막아 마을을 지켰다던?(*)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남편도 따라 웃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리며 바깥의 무성한 자연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여행하는 동안 호텔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토론토 사무실로도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그것은 호텔 자체의 보험으로도 커버 가능한 일로 끝났다는 뜻이다. 카페트를 널어 말리거나 교체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휴 다행. 그래도 호텔에 미안하고... 근데 그거 진짜 옷걸이처럼 생겼...

(모두 조심하셔요.)


*실화가 아니라, 미국 소설가가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쓴 소설 속 이야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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