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되는 사진
((여행 후반부에 위치한 내용이지만,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미리 발행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형 감기래. 목 아프대.
대답 없는 큰통수를 대신해 작통수가 말했다. 하지만 큰통수가 입을 닫기 시작한 건 그 이전부터다. 어쩌면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목감기라는 몸의 증상을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큰통수를 자극했을까.
노약자석에 덜컥 앉아서? 팁을 잊어서? 공공장소에서 도시락을 먹어서? 그러다 갈매기에게 뺏겨서?
또 귀퉁이에 시커먼 동굴을 끼고 곰마냥 웅크렸다. 곰의 걸음은 성큼성큼해서, 종종대며 따라가는 고심이의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사실 이제 고심이가 마음을 쓰는 건 작통수다. 늘 틈에서 자라온 아이. 큰통수의 오랜 방황으로 함께 멍들었던 아이. 마음껏 자신의 공간과 공기를 가져 보지 못한 채, 사이에서 사이를 가늠하며 성장한 아이.
신경은 쓰이지만 믿는다. 작통수는 늘 누군가를 배려하고 남은 몫으로 자신의 삶을 지어왔다. 얼마 안되는 그 몫이 중요해서 튼튼하게 짓는 법을 터득했을 것이다.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단단한 고갱이를 가졌을 것이다. 살아보면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건 남들이 볼 때 잘 보이는 것이고, 자신을 끝까지 지키는 건 견고함이다. 작통수는 쉬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배려는 그런 거다. 바깥을 향해 낸 마음이지만, 자신에게로 기어코 돌아오는 것이다.
큰통수가 입을 다물수록 작통수는 바지런해졌다. 오전 오후 빡센 일정을 소화하고도 밤엔 야경을 본다며 나갔다. 자기의 움직임만이 공기가 굳는 걸 막을 수 있다는 듯이 내내 헤비워커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뒤집어엎고 싶었다, 누군가의 기분을 맞추며 여행하는 일에 지쳤다.
큰통수는 아이디어도 많지만 고집도 세서 의견이 맞지 않을 때 성숙하게 풀어나가질 못한다. 인간성 좋은 작통수와 고심이(?)가 대충 져줘서 여기까지 왔다. 이제 큰통수의 불편한 리더십을 반납하고 속 편하게 여행하고 싶다.
그렇다고 바로 발을 뺄 수는 없다. 아직은 손이 닿을 때, 마음이 닿을 때, 온기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걸 조금만 더 지켜봐 주고 싶다.
그러고 보니 큰통수는 내내 무거운 카메라 가방과 비디오 장비를 메고, 한 번도 바닥에 내려놓지 않았다. 체격 좋은 동생에게 부탁하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계단을 만나면 고심이의 캐리어까지 번쩍번쩍 들지 않았던가. 자신에게 가장 힘들게 꼿꼿했고, 그저 자신만큼 아끼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 바운더리 안에 있었으면 해서 애를 태웠던 건지도 모른다. 엄마와 동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근사해 보였으면 해서... 흠, 좀 어리기는 하나 나쁜 마음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 다 좋기는 한데, 부러지면 끝이잖아. 때론 타협하고 어물쩍 넘어가고... 안되겠다, 언젠가는 뭉갬의 고수 고심이가 그 비법을 전해 주고 말리라.
일정이 남은 통수들을 뒤로하고 고심이는 숙소로 돌아왔다.
한숨 자고 나니 카톡이 울렸다. 큰통수였다.
아직 마음이 간단치가 않아 바로 톡을 열지 않았다. 화면에 한 줄짜리 미리보기가 떴다.
‘어무이...’
어무이?
통수들은 고심이가 뭘 잘못했을 때 극존칭을 쓴다. 어머님 그런 게 아니지요, 우기신다고 될 일이 아니옵니다...
나 또 잘못한 거야?
고심이는 발끈해서 톡을 열었다.
‘어무이
언능 내려오슈
노을이 끝내줘유’
고심이는 슬리퍼를 꿰차고 후닥닥 내려갔다.
사실 화해라 할 것도 없다. 모두 각자의 문제로 복잡해서 다른 이에게 낼 마음의 여유가 없을 뿐이다. 그게 때론 잔소리로, 때론 냉랭한 침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근본은 쉬 해결되지 않는다. 큰통수는 얼른 제힘으로 사회에 비빌 언덕 하나쯤은 마련하고 싶어 한다. 그 성격에, 화도 당당하게 내고 고마움도 당당하게 표하고 싶을 것이다. 당당하게 밥도 숨도 잠도, 먹고 쉬고 자고 싶을 것이다. 지금 상태로는 뭘 해도 별로인 거다. 자신에게 가장.
다만 남은 여행 동안 공기가 더 굳지 않게, 모호한 이유로 서로를 긁지 않게 표정을 열겠다는 것이다. 진지캐릭터인 그가 사투리로 쏘아올린(?) 톡에 피식 웃음이 났다. 그거면 충분하다.
스톡홀름은 말라렌이라는 거대한 호수 끝에 붙어 있어서 호숫물이 시내를 관통해 발트해로 흐른다. 물의 길인 수로가 지나는 스톡홀름은 그것만으로도 아름답다. 강 같은 호수와 주변에 늘어선 건물들, 배가 지나가는 고즈넉한 풍경을 숙소로 올라오는 길에 볼 수 있다.
그 언덕길에 통수들이 있었다. 큰통수가 작통수를 노을 앞에 세워두고 세심하게 프레임을 고르고 있었다. 사라져가는 빛을 붙잡아 실루엣 사진을 찍어 주려는 모양이다. 작통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도 돌렸다가 왼쪽으로도 돌렸다가 하고, 큰통수는 무릎을 굽혔다가 엉덩이를 뒤로 뺐다가 한다. 한동안 마음 불편했을 동생을 근사하게 담고 싶은가보다.
고심이도 사진을 찍으며 올라갔다. 그 모습들이 모두 풍경이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