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펙트 블루 (1998, 일본, 곤 사토시)
퍼펙트 블루를 보고 궁극의 체험은 오히려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퍼펙트 블루는 실사 영화도, IMAX 형식도 아니지만, 어떤 영화보다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해 준 영화다. 오히려 애니메이션이었기에 가능하다. 다인격과 그 속에서 겪는 혼란. 환상과 실제의 구분할 수 없는 경계를 너무나 잘 표현한 작품이며 실제 환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온 느낌이다. 나는 추상화된 개념(정신병, 감정, 생각 등)을 이미지적으로 구체화한 작품에 큰 경이를 느낀다. 하지만 그런 작품을 많이 본 적이 없다. 그 중 성공했던 작품은 이터널선샤인, 인사이드아웃,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정도다. 다인격 속에서 충돌하는 사람의 정신세계를 참신하고도 공감하게 그린 작품은 퍼펙트 블루가 처음이다.
이 영화는 따지면 해피엔딩이다. 아이돌과 배우 사이 실제 자신은 누구냐는 딜레마와 혼란 속 정체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미마’는 더 이상 치유될 수 없을 고통을 겪었다. 성폭행 씬을 적나라하게 찍히고, 사생팬에게 자신의 발자국까지 스토킹당하며, 주변 인물이 살해당하고,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루미가 자기를 죽이려들기까지 했다. 이 모든 비극적인 일은 자신이 배우라는 직업을 택했다는 이유에서부터 나타났다. 심지어 자신이 택하고 싶어 정한 길도 아니다. 이런 미마의 상황에 관객들은 결말을 전혀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미마는 고통 속 절대로 치유될 수 없는 인물로 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극심한 고통이 있었기에 결말에 이르러서는 치유될 수 있었다. 오히려 엄청난 고통을 겪음으로써 더 이상 자신에게 고통이 잔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영화 마터스에 ‘안나’라는 캐릭터도 많이 연상된다.
마터스 속 안나는 사이비 집단에 의해 감금되어 계속 고문받는다. 집단의 목적은 극심한 고통을 주어 천국을 보게 만들자는 데 있었다. 탈출하지 못한 채 고문받던 안나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단계까지 갔으며 결국 자기 피부가 모두 벗겨져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이후 안나는 현실 세계 넘어 무언가를 본 것처럼 영화는 연출한다. 고통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퍼펙트 블루 속 미마와 유사하다.
다만 마터스와 퍼펙트 블루와의 큰 차이점이 있다. 관객이 미마한테는 공감하지만 안나에게는 연민밖에 느낄 수 없다는 차이다. 공감과 연민의 차이는 크다. 공감은 관객이 캐릭터에 일심동체 한다면, 연민은 관찰한다. 공감이 나타나려면 자신도 대상과 같은 경험을 해야 했기에, 보통의 사람이 겪기 힘든 고통을 가진 사람에게 연민은 줄 수 있어도 공감은 하기 힘들다. 따라서 영화 마터스를 보면서도 안나에게 공감을 주기는 어렵다.
하지만 퍼펙트 블루속 미마는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다. 관객들은 미마의 주관된 모든 상황을 그대로 직면하고 체험하기 때문이다. 미마가 느끼는 상황, 감정, 머릿속 등 추상화된 것들을 이미지와 화면 전환. 매치 컷 등으로 밀도 있게 담아 보여준다. 이로 인해 관객은 미마와 같이 체험하고 이는 곧 경험으로 이어진다. 이후 자연스레 캐릭터를 향한 공감까지 이어진다. 관객이 경험하기 힘든 캐릭터를 공감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매우 대단하게 느껴진다.
퍼펙트 블루는 애니메이션의 놀라운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했던 작품이다. 특히 실사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장면들을 보면서, 오히려 ‘체험’의 영역을 끌어내는 건 애니메이션이 더욱 훌륭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흔한 귀멸의 칼날과 진격의 거인도 안 본 사람인데 이번 계기로 일본 애니메이션에 더 다가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