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것(HOT)? 차가운 것(COLD)?
1. 키오스크에는 없는 미지근함
카페에 들어가서 키오스크에 원하는 메뉴를 선택하고 나면 다음으로 이 질문을 받는다.
따뜻한 음료? 아니면 차가운 음료?
나는 주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는데, 결제 직전에 항상 차가운 음료를 먹을 건지 따뜻한 음료를 먹을 건지 선택하는 칸에서 잠시 망설여 본다.
'미지근한 건 없을까…?'
아무래도 내가 키오스크 버튼에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말하는 미지근한 커피라 함은 적당히 차갑지도, 적당히 따뜻하지도 않은 그런 온도를 말한다. 그래서 일단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나서 커피를 받으러 가면 조용히 요청을 드린다.
"저… 얼음 한 두세 개만 넣어주세요. 감사합니다."
2. 나의 커피 온도가 바뀐 이유
원래 나는 따뜻한 커피를 좋아했다. 대학교 졸업 후부터 비염으로 꽤 오래 고생을 했다. 약도 먹어보고 비염에 좋다는 차도 마셔봤지만, 몸을 항상 따뜻하게 유지하는 것이 비염에 가장 좋다는 말을 듣고 따뜻한 음료를 마시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본격적으로 아이가 태어나면서 커피의 온도가 달라졌다. 아이가 소파를 잡고 서기 시작하면서 고사리손에 잡히는 대부분의 물건은 아이를 다치게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뜨거운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아이 손에 닿을까 봐 커피를 마실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두 손으로 잡고 향기를 맡으며 음미할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식기 전에 마시겠다고 서두르다 보면 입 안이 데어 며칠을 고생하하기도 하고, 아이를 돌보느라 커피를 마시는 것도 까먹어서 다시 돌아보면 남은 커피들은 다 식어버리기 일쑤였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미지근하게 마시기 시작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아니 어쩌면 차갑고 뜨거운 그 어중간한 사이의 아메리카노의 온도를 선호한 것이다. 뜨거운 커피에 물을 살짝 섞으면 미지근한 커피가 됐다. 처음엔 그 온도가 어색하고 애매했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그 미지근한 온도가.
3. 변하지 않아서 다행인 온도, 룸 템퍼러처
하지만 미지근한 커피의 온도는 잘 변하지 않는다. 뜨거운 커피는 시간이 지나면 식어버리고, 차가운 커피는 얼음이 녹아 나중에는 이게 커피인지 보리차인지 애매할 정도로 맛이 옅어진다. 내가 기대했던 상태가 유지되지 않을 때마다 묘하게 서운해진다. 하지만 미지근한 건 처음부터 미지근하다. 기대도 실망도 크지 않다. 그저 같은 온도로 오래 남아 있다. 게다가 소중한 내 아이가 혹시나 내가 무심코 다른 곳에 올려놓은 커피잔을 만지더라도 크게 화상을 입을 일이 없다.
문득 승무원으로 일하던 시절 비행기에서 음료 서비스하던 때가 생각난다. 보통 탄산음료나 알코올음료는 얼음을 넣어서 손님께 제공하는 것이 서비스의 기본 매뉴얼이었다. 하지만 물을 요청하는 손님 중에는 "room temperature로 주세요" 하고 그 미지근한 온도를 찾는 고객들이 있었다. 영어에서 말하는 "room temperature"의 뜻처럼 이 미지근한 온도는 주위와도 참 잘 어울린다. 뜨거운 곳에서는 살짝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또 차가운 곳에 가면 살짝 차가워지기도 한다. 아마도 나의 "ROOM(방)"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특히 매일 마주해야 하는 가족과 가장 잘 어우러질 수 있는 온도도 바로 이 미지근함, room temperature가 아닐까 싶다.
4. 가족에게도 미지근함이 필요하다
생각해 보면 가족 관계도 내가 태어나서 맺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인연 중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 유교에 뿌리를 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정서상,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는 가족 이상의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기대한다. 그 기대가 채워지지 못했을 경우 더 크게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가족이라서 더 특별해야 하고, 가족이라서 모든 것을 함께해야 하며, 가족이라서 모든 걸 알아야 하고 항상 화목해야 한다는 생각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생각해 본다. 매일 부딪치는 가족이야말로 서로의 미지근함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서로 너무 뜨거우면 데고, 너무 차가우면 금세 식어버린다. 그런데 미지근한 온도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혹시나 서로를 오해하더라도 금세 적응한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고.
5. 깊어진다는 건 오래 머무는 힘
나는 낯선 환경을 좋아했고, 일회성 만남이 주가 되는 서비스직을 천직이라 느끼며 가끔씩 그 삶을 그리워한다. 오늘 만나 오늘 헤어지는 사람들,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 잠깐의 찰나에만 충실하면 그저 좋은 감정만 남기고 헤어질 수 있는 만남. 그게 자유라고 생각한 나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어쩌면 나는 누군가와 깊어지는 게 두려웠던 것 같다. 깊어진다는 건 모든 걸 다 이해해야 하고, 상대의 과거까지 꿰뚫어 알아야 하고,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나는 계속 움직였고, 뜨겁게 시작했다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남편을 만나 아이를 키우고 그 시간 위를 함께 보내면서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깊어진다는 건 모든 걸 다 아는 능력이 아니라, 같은 온도로 오래 머무는 힘이라는 걸. 미지근한 커피처럼 말이다.
6. 나를 바라보는 미지근한 시선
미지근한 커피를 즐기면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뜨겁거나, 지나치게 차가웠다. 잘하면 과하게 기대했고, 못하면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이제는 나를 조금 미지근하게 바라보려 한다.
"그래, 오늘은 이 정도면 잘했다."
"완벽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극단적인 따뜻함과 차가움이 아니라 온도 유지의 문제. 강렬함이 아니라 지속성의 문제 말이다. 결혼이 나를 바꿔놓은 건 거창한 사랑의 선언과 희생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이 미묘한 온도 조절 능력인지도 모르겠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그러나 쉽게 식지도 녹지도 않게 아슬아슬한 온도 위에 있는 편안함 말이다.
어쩌면 나는 이제야 미지근한 마음 상태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이상하게도 그 온도에서야 비로소 나를 조금 떨어져 바라볼 여유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