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친구와 성수역에서 급 벙개를 했다.
친구와 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예나 지금이나 고등학생처럼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고, 지금 내 불평불만들을 비엔나소시지처럼 줄줄이 늘어놓았다. 여자의 입에서 나온 불편사항의 답은 해결책이 아닌 공감대라고 했던가. 우리는 서로의 안타까운 상황에 갖가지 육두문자와 세상 짜증 나는 표정을 덧대 커피 한 모금에 녹여 호로록 삼켰다. 친구와 함께 자연스럽게 사는 이야기,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가 흘러갔다. 그러다 그 친구가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내 친한 친구들이 다 비슷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친구의 한마디 말에 나도 모르게 무심한 듯 공감했지만, 그 말이 오는 진동은 셌다.
고등학교 때는 거의 같은 지역의 친구들끼리 모여 수능이라는 큰 멀리뛰기 대회를 준비하느라 정신없었고, 비교 거리는 누가 어느 대학을 붙을 수 있는가 하는 성적 정도였다. 대학교 때야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놀고먹기 바빴고 대학교 4학년쯤 돼서야 취업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압박감이 찾아와 토익공부, 각종 인턴을 지원하며 일명 '스펙'이란 걸 쌓아갔다. 각자 원하는 곳이건, 원하지 않는 곳이건 묵묵히 자기 밥값을 해나가며 월급의 노예로 조금씩 익숙 해갈 때 즈음, 우린 어느덧 30대라는 앞자리 숫자가 바뀐 나이에 맞게 결혼 혹은 아이를 낳아야 했다. 물론 나야 시대의 평균적인 삶에서 조금 벗어난, 조금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친한 친구들의 만남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일명 '현실적으로 생각하기'라는 속세와 속물의 세계에 발 한쪽을 담으며 말이다.
어느 대학을 가느냐에 따라서도 인생이 많이 바뀔 수 있겠지만, 어떤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느냐도 큰 인생의 전환점이 되곤 했다. 친구들의 경우를 살펴봐도 큰 사업을 하는 집에 시집을 가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를 하며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사는 친구도, 둘 다 아직 모아놓은 돈이 얼마 없는 같이 대출금을 갚으며 전셋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친구도, 남편의 잦은 해외 출장으로 수입은 높지만 항상 남편을 그리워하는 친구도. 물론 어떤 남자를 만나느냐처럼 어떤 여자를 만나느냐도 똑같이 중요한 포인트다.
결과론적으로, 만약 친했던 친구사이에서도 경제적인 능력 부분에 큰 차이가 벌어진다면 슬프지만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이자 사람의 심리다. 그렇기에 친구가 하는 그 말이 너무나 와 닿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도 서툴고, 어려운 세상이
가끔은 너무 야박할 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