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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Du Jan 13. 2019

#57. 나는 구렁이 색시와 살고 있었다.


친구가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출퇴근 시간이 너무 늘어나 회사 근처로 독립을 했다. 그녀 또한 나처럼 부모님과 함께 살아온 터라 처음 살아보는 독립생활이 좋지만 너무 힘든 점이 많다고 했다. 일찍 퇴근했다는 해방감은 잠시, 밀린 빨래를 하고 집안을 정리하면 어느새 11시가 넘어 딱히 다른 것을 할 시간도 없이 잠들기 바쁘다고 말했다. 


"그동안 엄마가 다 해줘서 몰랐는데, 진짜 집안일이 할 일이 너무 많아"


독립해서야 알 수 있었던, 그동안 몰랐던 집안일들.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내 상황을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 "딸 일어나" 알람을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무시하고 다시 잠들기 반복. 서른이 넘었지만 아직도 엄마의 재촉성 기상소리에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켰고, 자고 일어난 침대는 일어난 상태 그대로, 한쪽엔 벗어 내던진 잠옷을 방치하기 일쑤였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깨끗이 정돈된 방. 마치 언제 지저분했었냐는 듯이.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벗어놓은 옷들은 당연히 새 옷이 되어 옷장에 차곡차곡 개어져 있는 줄 알았고, 먹을 것은 항상 냉장고에 가득 차 있는 줄 알았다. 바쁜 아침, 내 출근시간에 맞춰 이른 시간에 일어나 뭐라도 먹이기 위해 간단한 요리나 회사 가서 먹을 수 있는 것을 싸주는 것 또한, 반복되는 일상 속에 하나인 줄로 여기며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던가. 어느새 엄마에 대한 고마움은 흐릿해져 갔고, 당연히 엄마가 하는 일이라 생각하며 그분의 희생을 낮게 평가한 채 살아왔다. 


 늦은 저녁, 언제 집에 오냐며 걱정하는 엄마의 전화 한 통에도 귀찮으면 무음으로 돌리거나 무뚝뚝한 응답으로 한두 마디 하고 전화를 끊는 일들이 많았다. 엄마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중에 하나인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각 지역을 생생히 그려낸 영상들을 보며 소녀 같은 눈으로 “어머 저런 곳이 있었니 어머 너무 예쁘다. 엄마도 우리 딸이랑 같이 저런데 여행하고 싶네”라는 희망 부푼 따뜻한 말에도 “저기 가려면 비행기 타는 시간만도 10시간이 넘고, 엄마 다리도 아픈데 어딜 가”라며 볼멘소리만 해댔다. “그래, 같이 가자”라는 쉬운 말이 있음에도 말이다. 휴가 때마다 ‘이번엔 어느 나라를 여행하지’ 하며 나만의 여행 계획을 세우기 바빴던 모습이 문득 떠오르니 가슴 한편이 시리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꿈 많던 소녀 같은 우리 엄마도, 고된 삶에 치여, 각박한 세상에 치여 곱디고운 손은 주름 가득한 뭉뚝한 손으로, 생기 가득한 꿈으로 가득했던 세월은 어느새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라는 타이틀에 밀려 자식들의 인생의 조연으로 자처하며 살아왔겠지.  


엄마, 아직도 못난 딸이라 미안해

아직도 여전히 엄마한테 사랑 표현하는 게 서투네

우리 꼭 같이 해외여행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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