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브레드 한 여름호]
몸을 미워했던 날들
스무 살의 나는 거울을 보며 자주 고칠 곳을 찾았다. 눈은 쌍거풀 없이 큰 눈이 좋을 것 같았다. 가슴은 B컵 정도가 좋을 것 같았다. 겨드랑이 바로 아래의 튀어나온 팔뚝살과 사타구니 바로 아래의 꽉 찬 허벅지 살을 손으로 쪼개보며 이 지방은 왜 이리도 사라지지 않는지, 이걸 떼어내 가슴에 붙일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턱을 깎으면 엄청나게 아프다던데 과연 견딜 수 있을지 내 인내심을 따져보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얼마나 작아지는 게 내 이목구비에 어울릴지 가늠했다.
나는 오랫동안 내 몸을 미워하며 살았다. 동시에 타인의 몸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보다 키가 커서. 그보다 말라서. 그보다 피부가 좋거나 하얘서. 누군가가 나의 외모를 칭찬할 때 나는 그것을 곱씹으며 믿고 싶어졌고 사회적인 기준에서 나보다 못한 이와 함께일 때 은근한 우월감을 즐겼다. 동시에 사회적인 기준에서 나보다 잘난 이와 함께일 때는 괜히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뭐라한 것도 아닌데 내 태도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해졌다. 조금이라도 예쁘게 나온 사진을 오래 들여다봤고 못난 사진은 내 모습이 아니라 생각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런 내가 조금씩 싫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내가 못나서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일학년 때였다. 나는 여대를 다녔고 우리 학교에는 일학년이 필수로 들어야 하는 대형 강의가 있었다. 각 분야의 연사들이 매주 돌아가며 리더십을 가르치는 교양 수업이었다. 그중에서도 학교에 속해있는 한 교수가 '성'을 주제로 이야기한 것이 충격이었다. 우리보다 한참 나이든 여자였던 그는 맡은 시간동안 아주 공들여 성폭력과 성희롱의 기준과 그에 알맞은 대응을 가르쳤다. 어떤 것들이 성희롱이 되는지, 그것을 참지 않고 알맞게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혹여나 성폭력을 당하게 될 경우 학교에는 어떤 기관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대응에 필요한 증거물을 제대로 관리하는 방법과 합의된 관계에서도 피임을 요구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 지 등이었다.
그 강의를 듣는 동안 백 명이 넘는 여자애들은 숨을 죽였다. 이 학교를 다닌 선배들의 경험한 이야기들이었다. 어떤 예화에서는 탄식했고 낮은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배웠던 성교육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것이었다. 강의실을 나서며 나는 내가 들어왔고 경험한 수많은 성적 문제를 깨달았다. 이미 훌쩍 자란 중학생 여자애들의 가슴둘레를 실실 웃으며 직접 재겠다던 삼십대 체육 남교사, 그는 중학생들 앞에서 19금 영화 속 배우의 가슴이 성형한 것이라며 본연의 유방과 보형물이 들어있는 유방이 어떻게 다른지 열심히 설명했다. 그 외에도 들고 있던 회초리로 이름표를 가리킨답시고 내 가슴을 쿡 찔렀던 오십대 영어 남교사, 노트북에 교복을 입은 일본 여학생의 야동을 넣어뒀던 오십대 체육 남교사, 이게 등이냐 가슴이냐, 색기가 부족하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다, 농담이랍시고 지껄였던 동년배 남자애들...
성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성기의 구성, 역할이나 생리대를 사용하는 법 등이 아니었다. 그건 가르쳐주지 않아도 교과서와 생리대 사용법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태도'였던 거다. 물론 이 '태도'를 가르친다 해서 자신과 다른 성의 인간을 쉽게 말하고 대하는 타인의 태도까지 바꿀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다른 이들이 나의 외모를 자기 맘대로 말하고 행동할 때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해야 할지는 알아야 했다. 지금의 내가 그때와 같은 일을 겪었다면 그렇게 당황하며 그 상황을 무마하려고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나였다면 그런 말들에 내 몸을 부끄러워하고 그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외모와 다른 나를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도 나는 나를 보는 태도를 바꾸는 데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후로도 내가 정한 몸무게에서 조금이라도 늘어나면 먹는 양을 줄였고 나보다 마른 이의 곁에 서있을 때면 상대적으로 덩치 큰 코끼리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부러 더 힘주어 내가 향하고 싶은 이상향을 말했다. 외모로 누군가를 평가하거나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진짜 아름다움은 보이는 것에서 오는 게 아니다. 사람들과 몸의 자유를 대화했고 일부러 나를 꾸미지 않은 때도 있었다. 오랜 시간 나를 지배해왔던 태도를 바꾸는 데에는 순간의 기민한 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나는 내 몸의 콤플렉스를 보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 그가 내 몸매에 별 판단을 내리지 않은 것을 처음에는 의심했다. 하지만 오랜 대화와 그의 태도를 보며 나는 알았다. 철이 들어서. 혹은 나이를 먹어가니 교양 있어 보이려거나 그것도 아니면 나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 몸의 건강이 아닌 다른 것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과 스트레스로 어깨뼈가 앙상했던 내가 습관적으로 마지막 한 숟갈을 남겨둘 때 꼭 그 한 숟갈을 더 먹였다. 틀어진 내 발을 고칠 기구를 사오고 위장이 약하니 좋은 한의원을 알아 와서는 헤어지길 고민할 정도로 싸운 날에도 데려갔다. 나는 내가 갖고 있던 몸의 고민들을 솔직히 말했다. 우리 둘 다 이십대 중반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그는 내 고민들을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돼.
그의 생각을 알면서도 나는 내 태도를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결혼했는데 나중에라도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좋아하게 되면 어떡하지? 아이 낳고 살찌면 아내를 멀리하는 남자들도 있다는데. 젊고 곱던 시절이 지나 마음이 변하면 어쩌지? 그때마다 그는 나를 안심시켰지만 내 고민은 금방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혼여행 첫 날에도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그와 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정작 나는 그의 몸에 그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으면서 내 신경은 온통 내 몸에 쏠려 있었다. 살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시선으로 만들어진 태도는 나만의 노력으로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 후로도 그는 나를 안심시켰고 나도 나를 안심하게 하려 노력했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서 나는 조금씩 그 앞에서 자연스러워졌고 그렇게 내가 나를 보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나는 조금씩 내 몸에 던지던 불만을 멈췄다. 내 어깨 모양, 내 손 모양, 내 손톱의 길이나 머릿결, 타고난 모질이나 피부, 나이 들며 점점 늘어나는 사이즈와 몸무게 등. 세상에 다양한 체형과 피부가 존재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내 몸은 어딘가 부족한 몸이 아닌, 나의 몸이다. 이제는 패션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체형을 보완하는 옷'이 아닌, 내 몸에 편안한 옷을 입고 싶고 운동과 식단 조절은 건강을 위한 것이었다. 사이즈보다 내 몸의 상태를 잘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자유로워지니 더 자유로워지고 싶다. 나와 타인의 몸을 미워하기를 완전히 멈추고 구석구석 더 건강해지기에 힘쓰고 싶다.
2020년 8월 26일 수요일, 김영지
[주간 브레드 한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