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청바지 돌려입기> - 리나
*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네 명의 십 대 소녀가 있다. 그들을 임신한 엄마들이 한 운동센터에 다니며 그들은 뱃속부터 함께해왔다. 일생 단 한 번도 멀리 떨어져 본 적 없던 이들 사이의 거리는 지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엄마의 죽음 후에도 활달한 축구소녀 브리짓은 축구 캠프에, 예민한 문학소녀 칼멘은 이혼한 아빠의 집에 놀러 가고, 시니컬하고 당차지만 여린 티비는 그대로 이 마을에서 알바를 하며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한다. 그리고 민소매도, 딱 붙는 청바지도 입지 못할 정도로 수줍은 소녀인 리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는 그리스로 떠난다. 그리고 소녀들은 모두의 몸에 맞는 청바지를 택배로 주고받으며 각자가 겪은 일들을 편지로 전하기로 약속한다.
리나는 네 명의 주인공들 중 가장 소심한 소녀다. 그리스의 리나에게는 코스타스라는 피부가 검고 듬직한 남자가 다가오지만 그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집안 어른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하지만 리나는 줄리엣과 다르다. 자신의 마음이 그에게 가는 것을 알면서도 줄리엣처럼 사랑만 보고 대범하게 결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코스타스를 피하려 한다. 엄마를 잃은 브리짓이 축구선수로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젊은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는 동안, 칼멘이 새로운 가족을 꾸리려는 아빠를 미워하고 용서하는 동안, 그리고 티비가 백혈병에 걸린 어린아이와 우정을 쌓으며 진심이 담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동안 리나는 내내 자신의 사랑에 아주 소극적이다. 리나는 늘 미간을 찌푸린 소심한 표정과 눈치를 보는 태도, 징징거리는 말투로 영화 초반에는 그리스의 아름다운 풍광과 예쁜 외모 외에는 눈에 띄는 주인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 앞에 당당한 코스타스를 보며 리나의 마음은 조금씩 열린다. 그녀는 편지에서 말한다. '코스타스와 브리짓이 놀라운 건 바로 그거야. 그런 일을 겪고도 마음의 문을 열어두고 있는 것. 모든 걸 잃은 사람들도 사랑에 마음을 열고 있는데, 아무것도 잃지 않은 나는 왜 이렇게 겁을 내는 걸까.' 리나의 마음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때 코스타스는 망설이지 않고 그녀에게 더 다가선다. 그리고 그녀는 코스타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둘은 어른들 몰래 마음을 키워간다.
사랑에 빠진 리나는 예쁜 외모를 넘어서 더욱 사랑스러워진다. 더 이상 더운 그리스의 날씨에 자신의 몸을 긴 옷으로 꽁꽁 숨기지 않고 화사하고 시원한 옷을 입는다. 크고 아름다운 눈은 더 이상 눈치 보지 않고 움츠러들었던 턱은 고개를 들어 당당하게 웃는다. 긴 머리를 풀어 코스타스에게 더 아름답게 보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배를 타고 스쿠터 운전법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새로운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 그녀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행복이 넘쳐난다.
어느 달빛이 밝은 밤 코스타스의 배를 타고 나가 둘은 깊은 대화를 나눴다. 리나는 자신의 친구들에 대해 말한다. 언제나 당당하고 똑똑한 나의 친구들, 그들이 부럽다고. 코스타스는 그런 리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다. 나는 네 안의 아름다운 것들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눈빛과 그런 사랑이 쑥스러운 리나는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며 묻는다. 무엇이 보이냐고. 코스타스는 잠시 쉬고는 말한다. "모두 다." 코스타스는 리나의 부끄러움 뒤에 숨겨진 열정과 용기,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림에의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응원하고 사랑에 더 당당해질 수 있도록 그 열정을 불어넣어주는 사람이었다.
어른들의 반대와 이제 그리스를 떠나야 하는 코스타스. 리나는 다시는 코스타스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처음 이 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할머니 댁의 앞마당에 앉아 그리스의 진한 햇빛을 받고 있다. 하지만 리나의 표정은 그때와 다르다. 이제는 더 이상 이 곳이 어색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헤매지도 않는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집중한다. 그리고 결심한다. 이 마지막 순간 리나는 스스로 주인공이기를 선택한다.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고집스럽게 나의 사랑을 지키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코스타스가 알려준 대로 스쿠터를 타고 그에게 달려간다. 그가 그랬듯 망설이지도 쑥스러워하지도 않고. 그리고 흘러나오는 음악은 Be be your love. 그렇게 두 사람이 다시 마주하는 장면은 명실상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타고난 성격이 당찬 인물의 용감한 행동보다 소심하고 나약한 자신을 한탄하던 사람이 자신을 넘어서 무언가를 쟁취하는 순간이다. 리나는 줄리엣처럼 용감하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훨씬 지혜롭다. 무모하게 자신을 던지지 않고 당당함을 선택한다. 계속해서 숨기기보다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설득하고 자신의 사랑을 숨기지 않은 채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행복해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결국 '나'를 위한 선택을 할 때 모두가 행복해진다. 리나는 그렇게 스스로 주인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