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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May 29. 2023

증발하지 않는 행복

엄마 경력 907일 째



첫째 때는 마침 남편 방학인데다 코로나로 세상이 뒤숭숭해서 우리 둘이 산후 조리를 했다. 밤새 돌아가며 아이를 트름시키고 낮에는 나는 2층 방에 이서와 꼼짝 않고 머무르면 남편은 집안을 오가며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장을 보고 알바도 했다. 그렇게 6주가 지나고 남편은 조금씩 불만이 생겼다. 왜 나는 공부도, 일도, 집안일도 육아도 전부 다 해야 하지? 그리고 나는 완전히 바껴버린 내 삶에 적응을 못 하고 헤맸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 갈등이 싹텄고 이서가 돌이 될 때까지 우리는 참 많이 싸웠다. 그냥 싸움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미워했고 우리의 생활을 미워했다.


사실 남편이 유학생이 아니었다면 우리 사정은 조금 달랐을 거다. 한국에 있었다면 반찬이라도 사다 먹었을테고 요리가 귀찮을 땐 가끔 배달 음식도 시켰을 거다. 둘 중 하나라도 돈을 벌었을테니 식기 세척기라도 하나 들였을테지. 가족들에게 이서를 맡기고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내 성격에 아마 아이가 조금 크면 어린이집에 보내고 다시 일을 시작했을 거다. 그러면 그렇게까지 산후 우울을 겪지도 않았을 거다. 이런 나의 상상은 내 우울을 더욱 깊어지게 했다. 이 모든 어려움이 남편이 자기의 꿈에 욕심을 냈기 때문인 것만 같았다. 심지어 남편은 신학생. 이 공부를 마친다 해서 우리에게 부유하고 안락한 미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 한켠에 남편의 공부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남편을 미워하면서 동시에 그런 나를 미워했다. 돈과 시간이 부족한 내 생활을 미워하면서도 남편이 가정을 보호하고 유지하려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나 괴로웠다. 이 모든 상황과 감정을 피할 수가 없어서였다. 게다가 코로나로 사람들은 서로 오가지 않았고 마음 놓고 아이를 데리고 갈 곳도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 종일 집에 있는 건 나 혼자 있는 것보다 더 괴롭고 너무 외로웠다.


하지만 신학교 안에 있는 것이 나를 보호하기도 했다. 신학교 안의 선배 아내들을 만나 모두가 비슷하게 걸어갔던 이 시간에 같이 울며 조언과 위로를 얻었다. 다 같은 처지기에 내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들이었다. 갈 곳은 없었지만 신학교 안의 사람들은 아이에게 친절하고 안전해서 이서는 추운 날에도 학교 잔디밭에 나가 종일 뛰었다. 특히나 유학생의 삶은 품앗이로 이루어지는데 이사할 때면 남자들이 각자 차를 갖고 모여 짐을 옮긴다. 누군가 아프거나 아기를 낳으면 아내들은 각자 가능한 날짜에 자기 이름을 걸고 몇 주간 그 집에 음식을 배달한다. 당장 기숙사를 구할 수 없을 때는 처음 보는 사람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해주기도 하고 처음 온 학생을 위해 집과 차를 알아보고 장을 보는 모든 일정에 자기 시간을 써서 라이드를 해준다. 장학금의 기회가 있을 때 자신보다 어려운 형편의 동료 학생을 추천하고 아무도 질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과 나도 여지껏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요새 남편은 일과 공부, 사역 외에도 아주 바쁘다. 학기가 끝나며 주변에 떠나고 오는 사람들로 이사가 많아졌다. 그간 우리를 도와줬고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편은 피로를 무릅쓰고 짐을 옮겼다. 차가 고장난 이를 위해 발이 돼줬고 틈틈이 계절학기를 준비하고 매주 밀려오는 일들을 해낸다. 우리 부부는 요새 하루가 어찌 가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지낸다.


지난 금요일에 공부하러 학교에 갔던 남편이 갑자기 카톡으로 왜들 책머리에 가족에게 감사 인사를 쓰는지 알겠다고 했다. 가족들의 헌신이 없이는 공부할 수가 없다고. 앞서 시간이 부족하다는 말을 했기에 나는 내 헌신이 더 필요하냐고 물었는데 남편은 그게 아니라고 했다. 내가 헌신해주니 자기가 가정도 갖고 하고싶은 공부도 이만큼이라도 공부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런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깜짝 놀랐고 내 노고가 그렇게 전해졌다니 행복했다.


유학생이 아닌 삶과 비교하면 여전히 우리 삶은 정말 가난하고 팍팍하다. 나는 카페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는 것도 흔한 일이 아니고 우리는 미국에 와서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지 않았다. 지출은 온통 식비, 생필품 아니면 아이들 물건이다. 그래도 이 삶이 너무나 풍요롭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뭔가를 갖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들지 않고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안다. 사람들은 서로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빌려주고 내어준다. 어떤 때는 부탁하지 않아도 나의 필요한 것을 기가 막히게 알고 채워주는 사람도 만난다. 서로를 예뻐해주고 위로하고 돕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사실 오늘은 정말 힘든 날이었다. 지난 삼일 간 눈 떠서 잠들 때까지 독박 육아를 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여러 일로 지쳐서 방전됐다. 오늘도 남편이 병이 날 것 같아 먼저 자게 하고 아이 둘을 재우는 미션을 수행했다. 이한이가 잘 자줘야 이 미션이 수월한데 아이들도 주말 지나며 피곤하니 이한이는 한 시간 내 울었다. 이서는 곁에서 심심하다면서도 잘 참아줬는데도 나는 점점 지쳤다. 이한이를 가까스로 재우고 내내 엄마를 기다리며 혼자 블럭 놀이를 하던 이서에게 다가갔다. 이서는 드디어 엄마와 같이 놀 수 있어 신이 났는데 나는 이미 너무 지쳐서 제대로 반응해줄 수가 없었다. 나는 호기롭게 남편을 쉬게 하고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한이에게 얼른 자라며 잔소리하고 훌륭하게 기다린 이서에게도 엄마가 너무 힘드니 그만 놀자고 대뜸 짜증을 내버렸다. 이서는 혹여나 이한이가 다시 깨어 엄마를 뺏길세라 얼른 이를 닦고 곁에 누워 잠이 들었다.


아이들을 모두 재우고 다시 부엌에 내려와 젖병을 씻었다. 그동안 내 안에 화가 차올랐다. 남편은 왜 나를 돕지 않고 자꾸 밖에서 돕고 다니나. 백일도 안 된 애가 있고 그 말은 나도 아이를 낳고 회복이 덜 됐다는 건데. 내일 남편에게 아주 단디 말해야지. 속으로 툴툴대며 설거지를 마치고 올라와 따순 물로 샤워를 했다. 내 몸을 씻는 동안 조금씩 마음이 풀렸다. 그래, 남편도 우리가 받은 도움을 갚는 중이지. 이 저녁에도 남편이 이 모든 일정이 어쩔 수 없어 나를 많이 못 돕는다며 미안해했다. 그리고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한이는 두 달 밖에 안 된 아기가 울고 보채지도 않고, 안아주거나 다른 도움 없이 누워 잠을 잔다. 이서는 본인이 원했던 동생이 아닌데도 점점 이한이를 예뻐하고 바쁜 엄마를 참아준다. 남편은 가정을 보호하고 맡은 일을 해내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나도 이 가정을 잘 꾸려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피곤한 것뿐이다.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지난 겨울에 나와 남편의 동생들이 삼 주간 미국으로 여행을 왔었다. 주중에는 여행하고 주말에는 우리집에 머물며 함께 교회도 가고 우리 생활을 함께 했다. 동생은 며칠 전 나와 통화하며 내가 더 어려보인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 우리집에 머물던 때를 얘기했다. 누나랑 매형은 잘 산다고. 이 둘에게 고민은 가정 안의 일이고 가난해도 부족할 게 없어 인상적이었단다. 동생과 통화를 마치고 내가 얼마나 안락한지 생각했다. 통화하는 동안 나는 아기띠로 이한이를 안고 집 앞에서 이서와 뛰어놀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이제 서로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점점 알아가고 있다. 상대가 더 일하길 바라고 미워하기보다 서로를 위해 좀더 움직이고 그 마음을 고마워하는 것. 작은 일에 기뻐하고 아이들이 주는 행복을 충만히 누리는 것. 시간을 내어 가족과 함께하고 지나면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을 놓치지 않는 것. 배우 류승범은 유퀴즈에 나와 아무것도 없이 그냥 행복한 것을 가족을 통해 배운다고 했다. 점점 개인의 삶이 중요해지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키우는 일이 괴로운 일로 비춰지지만 가정을 평화롭게 지켜내는 사람이야말로 어디서든 평화를 불러올 수 있는 사람이다. 그건 아주 귀한 재능이며 돈도 재능도 성공과 명예도 줄 수 없는 행복이다. 사실 과정의 괴로움 없이 얻는 행복은 쉽게 증발해 버린다. 그래서 이렇게나 많은 힘과 노력이 들어가는 가정은 증발하지 않는 행복이다. 그렇다면 이 대단한 사랑에는 희생만 있느냐. 그렇지 않다. 부부 간의 오랜 갈등을 지나 매일을 치열하게 살아내 얻은 행복은 온전히 내 것이다. 서로를 잘 사랑할수록 사랑은 더 큰 사랑을 바라게 된다. 그리고 점점 커진다. 언제나 아이를 재우고 마음을 치며 다짐하듯 내일은 모두를 더욱 사랑해줘야지.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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