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경력 1603일
2월에 엄마가 미국에 다녀갔다. 5년 반 동안 미국에 와 아이도 낳고 키우는 동안 엄마가 미국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유학생 아내로 사는 동안 간간히 어머니가 미국에 와서 아이들에게 할미 사랑도 주고 유모차 밀고 함께 산책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주변 사람들 보며 부러웠지만 엄마에게 적극적으로 오라고 해본 적은 없었다. 엄마의 재정을 생각해서였다. 한 번 오는 것이 부담될 엄마에게 내 마음을 소상히 전하면 서로 속상하기만 할 것 같았다. 엄마는 종종 돈을 보내기도 했는데 나는 그때마다 돈을 보내지 말고 엄마가 직접 오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엄마나 시어머니나 엄마 마음은 다 같았다. 내가 한 번 갈 바에야 너네 도와주는 게 낫지.
그러다가 지난 연말에 플로리다에 면접 과정으로 방문했다. 우리가 살게 될 수도 있는 곳이니 남편은 내 느낌이 어떤지 물었다. 사실 플로리다는 너무나 나에게 잘 맞는 곳이다. 내 노년의 꿈은 바다와 야자수가 가득한 하와이에서 동화 쓰며 아이스크림 파는 할머니가 되는 것일 정도로 이런 분위기와 환경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느낌은 아주 단순했다. 내 나라도 아닌 곳에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아야 하다니. 나는 이사하기 전에 엄마를 보고 오고 싶다고 했다. 그래야 내 안에 일렁이는 향수병이 좀 잦아들 것 같다고. 남편은 비행 편을 찾아보더니 2월에 들어서면 저렴해진다며 엄마를 한 번 오라고 하라 했다. 나는 처음으로 구구절절 엄마에게 내 마음을 말했다. 엄마가 꼭 한 번 와서 이한이 예쁠 때도 보고 이서가 얼마나 잘 크고 있는지도 보고 나도 엄마랑 산책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플로리다로 이사했다. 시어머니도 엄마와 통화하며 딸 보고 싶지 않느냐고 한 번 다녀오라고 했는데 엄마는 울었단다.
그리고 엄마가 왔다. 캐리어 가득 나에게 줄 옷과 책, 사위에게 줄 영양제, 아이들 줄 책과 선물을 가득 담아 왔다. 이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가까이 살거나 찾아오는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하곤 했는데 미미(이서는 미미, 함미로 두 할머니를 구분한다)가 온다니 몇 주 전부터 설레서 전 날은 잠도 제대로 못 들 정도였다. 새벽바람에 아이들은 벌떡 일어나 정말로 미미가 왔는지 확인했다. 해도 뜨기 전에 미미 캐리어는 해체되고 아이들은 선물을 푸느라 정신없었다. 미미가 방문 열고 나오면 애들은 후다닥 달려가 나를 찾지도 않았다. 이서는 잠들기 전까지 미미 곁에 딱 붙어 마지막 스트레칭까지 함께하고 겨우 끌려와 침대에 누웠다. 이한이는 쑥스러우면서도 미미가 좋아 주변을 맴돌며 자기가 잘하는 숫자와 색깔, 알파벳 읽기 장기 자랑을 계속하고 엄마와 아빠에게도 2주에 한 번 해 주던 뽀뽀를 미미 만난 지 삼일 만에 해줬다. 아이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본인들 방으로 가지 않고 미미 방으로 갔다. 엄마가 함께 지내는 시간은 2주밖에 안 돼서 시차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해롱대며 지내다 갔지만 졸린 눈 비벼가며 이서의 수다 폭격도 맞아주고 이한이 귀여움에 푹 빠지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외출해도 어른이 둘이니 나도 너무 편했다. 놀이터에서 아직 혼자 놀기 불안한 이한이를 돌보면 이서는 혼자 노느라 심심해했는데 역할을 나눌 수 있어 내 몸뿐 아니라 마음도 편했다. 나는 엄마 덕에 밥도 천천히 하고 청소도 나눠했다. 나도 나지만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했다. 시차로 힘들어 엄마가 한두 시간씩 방에 누워있어도 엄마가 저기 어디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마음이 누그러들었다. 그리고 엄마 덕에 이서와 이한이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도 많았다. 내가 키워본 아이는 이 둘 뿐이라 내 세계는 여기가 끝인데 엄마는 나와 동생도 키워봤고 수많은 아이들을 돌보고 겪어봐서 이서의 강약점도 자세히 알려주고 특히 이한이에 대해서 나에게 많이 알려줬다.
물론 엄마와 딸이 함께 삼일 이상 지내며 안 싸우는 것은 마치 유니콘을 만나는 것 같은 일이라 우리도 대판 싸웠다. 아이들 유모차에 태우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산책하다 말고 각자 갈 길로 헤어졌다. 하지만 가는 시간이 아까워 얼른 풀었다. 엄마는 나와 대화를 더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남편도 먼저 떠났고 아들은 늘 바쁘고 친구들에게는 한계가 있어 할 수 없던 말들을 나에게 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그저 엄마에게 내 자식들 예쁜 것 보여주고 엄마에게 응원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는데 엄마는 손주들이 아무리 예뻐도 엄마의 자식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걸까. 우리는 늘 그랬던 것처럼 마주 앉아 울고 서운한 것들을 다 쏟아냈다. 그러고 나면 서로 어떤 걸 조심해야 하는지, 뭘 더 해줘야 하는지 알게 된다. 어른들이 우는 동안 아이들은 자꾸 방에 들어와 왜 우는지, 언제까지 우는지 살폈다. 어른들도 눈물이 날 때도 있는 거다. 어른들도 서로 그립고 서로가 필요하고 그래서 서운한 때가 있다. 짧은 시간이라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지만 남편이 쉬는 날마다 온 가족이 이곳저곳 멀리 구경도 다녀오고 남편이 아이들 돌보는 저녁에 엄마와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엄마가 가기 전날은 엄마 침대에서 둘이 꼭 껴안고 새벽까지 수다 떨다 잠들었다. 나는 엄마가 와줘서 힘이 났다고 고맙다고 백 번 조금 안 되게 말했다. 엄마는 한 번 와보니 좀 멀어도 별 것 아니라고 또 오겠다고 했다.
엄마는 몇 벌 안 남은 본인 옷과 고마운 몇 사람에게 나눠줄 간식거리를 좀 담아서 텅텅 빈 캐리어로 돌아갔다. 엄마가 공항 안에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줄을 서서 가라고 자꾸 허공에 손을 미는데 나는 괜히 발이 안 떨어져 한참 서 있었다. 엄마가 볼까 몰래 울었다.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울었다. 엄마는 후련하게 집에 갔으려나. 나는 집에 오며 엄마가 여기에서 기대했던 시간이 뭘까 생각했다. 나도 손주도 봐야 그게 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걸까. 항상 사람 사이에는 적당한 선이 있는데 서로의 자리에 서볼 수 없어서 다 알 수 없고 지키기 어렵다. 집에 돌아간 엄마는 또다시 엄마의 살 길을 찾았고 돈이 생기면 또 나와 동생에게 보냈다. 엄마는 스스로를 무심한 엄마라고 하는데 어린 나는 그래서 서운했고 그래서 자유로웠다. 엄마는 스스로를 욱하는 엄마였다고 하는데 어린 나는 그래서 겁이 많아졌지만 지금은 그 젊은 엄마를 이해한다. 엄마가 최선을 다해 너희를 키웠다는 말을 스무 살에는 변명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안다.
나의 엄마, 나의 할머니들, 남편의 엄마, 남편의 할머니. 내 삶의 일부인 여자들이 그 시대에 지나온 삶을 생각하면 나는 늘 마음이 저리다. 엄마, 어린 은호는 이서만 할 때 죽음을 알았다. 부모는 생활을 이어가려면 늘 바빠서 어린 딸의 마음을 들여다볼 새가 없었다. 어린 은호는 동네 언니들에게 죽음이 무엇인지 듣고는 나는 죽어도 되지만 엄마나 아빠가 죽을까 겁이 나서 이불속에서 잠 못 들고 흐느껴 울었단다. 한 방에 가족이 모여 자는데 생활에 치여 피곤한 부모가 새벽에 깰까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두 벌 뿐이었던 나이론 치마가 뒤로 말려 팬티가 보일까 걱정하며 잡아당기던 어린 은호, 늘 외로웠는데 표현할 곳이 없었고 위로받을 곳이 없었던 어린 은호, 늘 몸이 약해 자주 쓰러지고 아팠던 어린 은호, 사랑이 뭔지 어떤 사랑이 나를 위한 건지 가르쳐줄 곳이 없었던 젊은 은호, 자주 아픈데도 자꾸 일을 해야 했던 엄마 은호, 그렇게 두려워했던 죽음이 결국 남편을 먼저 데려가버린 중년의 은호, 딸은 멀리 타국에 가고 아들은 뒤늦게 군대에 가 혼자 집에 남겨졌던 은호. 엄마에게 고맙다고 하니 엄마는 본인이 더 기쁘단다. 엄마의 문자를 보고 끝없이 자기를 보라며 나를 부르는 이서를 보며 생각했다. 엄마가 내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무리 바쁘고 치사하고 땀 냄새나는 하루였더라도 한 번은 물어봐주고 싶다. 오늘은 어땠어? 다친 곳은 없어? 어떤 걸 배웠어? 우리 한 번 찐하게 안을까? 그리고 같이 가서 양치도 하고 세수도 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옆에 누워 잠들 때까지 기다려줘야지. 소중한 우리 딸, 엄마한테 와줘서 고마워, 하면서. 나는 영원히 엄마의 엄마일 수는 없으니 딸로 엄마를 좀 더 위로해야겠다. 소중한 내 엄마, 씩씩하게 살아줘서 고마워. 두렵고 외로울 일 많은 삶이었어도 자꾸만 용기 내서 지금까지 온 엄마를 칭찬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