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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Aug 19. 2017

큰 산을 넘는 따뜻한 바람

영화 <히든 피겨스>


* 영화의 결말이 포함돼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워온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인종 차별이 있을 때에는 백인들이 흑인을 차별하고 그들을 노예로 부리거나 낮은 계급의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당연시됐다. 과거의 여성들은 배울 수 없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고, 어린이의 인권이 없었을 때 아이들은 헐값에 팔려가거나 버려지던 것이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편견과 익숙한 가치들을 넘어서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이 영화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든 알려지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1960년대 초 미 항공우주국 나사(NASA)는 누가 먼저 우주에 사람을 보낼지 러시아와 경쟁하고 있었다. 그 시절 미국의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화장실을 쓸 수도 없었다. 같은 좌석에 앉을 수도 없었고, 심지어 도서관에서도 같은 구역의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이런 시대에 나사에서 복잡한 수식과 자료를 정리하는 전산원으로 일하던 흑인 여성들이 있었다. 컴퓨터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시대, Computer라 불리던 이들이었다.





엔지니어가 되기를 권하는 질린스키와 메리.




아무리 큰 기계도 척하면 척하고 문제점을 찾아내며 아이디어를 내는 메리에게 상사 질린스키는 그녀가 교육을 받고 '진짜 엔지니어'가 되기를 권한다. 메리는 여성이자 흑인인 자신이 그런 기회를 얻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묻지만, 질린스키는 그 자신이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전쟁 중 대학살로 가족들을 잃었고 편견과 차별을 겪으며 그 자신이 먼저 한계를 넘어선 사람이었다. 그는 메리에게 묻는다. 과연 당신이 백인이고, 남자였다면, 이 교육의 기회를 포기했을 것인가. 메리는 답한다. 그럴 필요가 없죠, 그랬다면 저는 이미 엔지니어가 됐을 테니까.




메리는 그렇게 엔지니어가 되기를 꿈꾸기 시작한다. 하지만 나사의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꼭 들어야 하는 특강은 백인 학교에서 열리고, 피부색이 다른 그녀는 수업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조차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냐며 엔지니어의 꿈을 믿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메리는 똑똑하고 야무지다. 그녀는 직접 자신의 사안을 법정에 올리고 판사 앞에서 예상을 깨는 주장으로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녀는 감정에 호소하지도 않고 동정을 얻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자신을 백인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판사에게는 '최초'의 사건이 될 것이며 앞으로의 역사상 중요한 판결이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자신의 기회이자 판사에게는 명예가 될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고, 그녀는 버지니아주에서 흑인 최초로 백인 남성들 사이에서 수업을 듣고 당당히 나사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된다.





세 주인공. 메리 캐서린 도로시.




도로시는 갑자기 공석이 된 관리자 대신 젊은 전산원들을 관리하며 온갖 관리자의 업무를 도맡아 하고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관리자의 업무들을 이야기하며 그에 맞는 대우를 요구하자 인사 담당자 미첼 부인은 흑인들에게 그런 업무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하지만 도로시 역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빨리 알아채고 앞서가는 지식인이었다. 그녀는 프로그래밍에 관련된 자료를 공부하며 컴퓨터가 개발되면 그녀와 함께 일하는 전산원들이 모두 직업을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앞선 기술을 미리 가르친다. 그리고 기지를 발휘해 나사의 프로그래밍 담당자가 되고 모두와 함께 그 자리를 누린다.




인사 담당자 미첼 부인은 도로시가 의리를 지키고, 함께 일하던 이들과 같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며 조용히 그녀에게 말한다. 당신들에게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고. 그저 그녀는 자신이 배워온 대로, 아는 것을 말하고 행했을 뿐이다. 후에 도로시가 새로 만들어진 대형 컴퓨터 IBM의 프로그래머가 되어 함께 일하던 전산원들이 직업을 잃지 않고 새로운 업무를 할 수 있도록 하자 미첼 여사는 그녀에게 관리자라는 새로운 직함을 전달하며 늘 도로시라 부르던 그녀를 존중하여 '미세스 본'이라 부른다.





IBM을 향해 가는 도로시와 흑인 여성 전산원들




러시아가 먼저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지구를 돌자, 해리슨 본부장은 마음이 급해진다. 그는 수학을 다룰 줄 알고 숫자 그 너머의 의미를 볼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 수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캐서린은 그의 부서에 스카우트되어 성공적인 발사를 위해 필요한 숫자를 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고 자료의 주요 내용은 모두 검게 칠한 뒤 그녀에게 준다.




하지만 캐서린은 그 안에서도 단서를 찾아 난제를 풀어낸다. 일하는 건물에는 흑인 전용 화장실이 없어 매일같이 800m 떨어진 건물로 달려가 화장실을 가고, 백인 직원들이 따로 둔 흑인용 커피 포트를 사용하던 그녀는 차별 앞에 당당하게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을 말한다. 그리고 그의 상사이자 본부장인 해리슨은 그런 그녀를 존중한다. 그에게는 자신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의 생김새나 타고난 성이 중요하지 않다. 그는 당장 행동에 옮겨 흑인과 백인으로 나눠져 있던 화장실 표지판을 떼어버린다.





숫자 너머를 보는 캐서린




캐서린은 부서를 처음 옮긴 날, 제대로 일할 수 없게 하는 사람들 사이에 지쳐서 집에 돌아왔다. 피로에 지쳤지만 그녀는 딸들을 진심으로 대한다. 마을에 새로 부임한 존슨 대령이 그녀에게 호감을 갖는다. 하지만 그는 여자들, 그것도 흑인 여자들에게 중요한 역할이 맡겨지는 것을 신기해하며 무례를 범한다. 남편이 죽고 아이들 셋과 남은 캐서린은 그를 잡으면 편안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자부심을 저버리지 않는다.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며 시간이 지날수록 캐서린이 점점 매력적인 여자로 느껴졌다. 그녀는 다정하며 당당하고, 진실하며 지혜롭다. 이런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고 프러포즈하는 존슨 대령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가 결혼해 주겠냐고 묻기도 전에 대답을 먼저 해버린다. 그녀의 가족도 저버리지 않고 함께하겠다고 약속하는 존슨과 너무나 기뻐하는 캐서린을 보며 그녀의 행복이 평생 가기를 기도했다(그리고 실제로 평생을 함께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보고 듣고 배워온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겉모습이 아닌 진짜 중요한 것들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재능과는 상관없이 인종과 성별로 자신의 도전을 막는 세상 앞에서 캐서린과 메리, 도로시는 문을 두드리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며 타인과 함께 성장한다. 그녀들에게는 재능을 알아봐 주는 상사들이 있었고, 기계보다 정확한 자신의 계산을 믿어주는 비행사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스스로의 재능을 믿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서로가 있었다.




흑인 전산원들에게도 악수를 청하는 우주 비행사 존 글렌.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다.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난 것도, 흑인으로서 차별을 허용하는 주에 살고 있는 것이나, 다른 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인정해주지 않고, 남편이 자신의 도전을 반대하거나 혹은 그럴 남편조차 없는 상황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지 않고 진실하고 지혜롭게 더 나은 방향을 찾았다. 큰 산 앞에 주저앉지 않고 돌부리를 하나하나 넘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갔다. 그렇게 그들은 재능을 펼치며 인생을 채우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다.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이 거센 바람이 아닌, 짙은 햇빛이었던 것처럼, 편견과 차별을 넘어서게 하는 힘은 아주 따뜻하고 긍정적인 것들에서 왔다. 그것은 그녀들 자신의 실력과 자긍심에서 오는 진실함, 그리고 순간의 기지와 지혜로 가능했다. 그렇게 그들은 따뜻한 바람으로 큰 산을 넘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7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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