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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Dec 16. 2018

4. 주말의 명화



어린 시절부터 우리 가족은 영화를 많이 봤다. 잘 만들어진 영화가 있다고 하면 종종 다 같이 영화관에 갔고, 명절이면 특선으로 방영해주는 성룡 영화나 007 시리즈를 보는 것이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이 영화들은 너무 많이 봐서 장면 순서는 물론이고 배우의 표정이나 말투까지 기억할 정도였는데, 얼마나 재밌는지 아는 것을 다시 보는 것은 정말로 재밌다. 초등학생 때는 아빠와 엄마가 자주 비디오를 빌려와 거실의 두터운 자줏빛 커튼을 치고 함께 봤다.


아홉 살 무렵 그렇게 <타이타닉>을 보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인 잭은 당시 내 이상형에 꼭 맞는 사람이었다. 가난하지만 열정적이고 진실하고 용감한, 그런 사람. 당시에 이렇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 말하자면 그렇다. 주인공도 멋지고 영화는 웅장하고 긴장돼서 정말 힘들게 보고 있는데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 있었다. 미행하는 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던 잭과 로즈가 차에 숨었는데 어느 순간 차 유리는 뿌옇게 김이 서려 있었다. 잠시 후 갑자기 손바닥이 퍽, 하고 유리창에 붙더니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어린 나에게는 그 장면이 꼭 공포 영화 속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나는 옆에 있던 엄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었다. 엄마는 장난기가 많아서 가끔 나를 놀리면서 장난꾸러기처럼 웃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그런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저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는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나는 그 장면이 얼마나 야한 것인지 알게 됐지만. 그때 아빠는 못 들은척한 게 분명하다. 왜냐면 원래 아빠는 우리가 조금만 뒤척이고 소리를 내도 왜 그러는지 꼭 봐줬으니까.


여전히 초등학생이던 어떤 토요일에 아빠와 단둘이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있었다. 이건 우리에게 아주 비밀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다음 날 아침 일찍 교회를 가야 해서 엄마는 항상 토요일에 일찍 자도록 했다. 하지만 엄마는 늘 먼저 잠들어서 우리는 그때를 노렸다. 나는 내 방에 들어가 잠든 척했고, 아빠가 먼저 나가 TV를 틀고 볼륨을 줄이면 나는 다시 살금살금 거실로 나가 아빠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날의 영화는 <아마겟돈>이었다. 우리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이 영화를 봤지만, 늘 그렇듯 재미가 보장된 것을 또 보는 재미는 놓칠 수 없다. 영화는 절정을 향해갔고, 주인공인 브루스 윌리스는 딸을 위해 딸의 약혼자를 돌려보내고 홀로 소행성에 남아 지구를 구한다. 그가 영화 내내 미래의 사위(진짜 사위가 됐을지는 알 수 없지만..!)를 탐탁지 않아 했기 때문에 이 장면의 감동은 더 커진다. 사실 그는 딸의 남자친구를 아끼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죽음 후에 돌아온 약혼자를 안으며 환하게 웃는 딸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저것이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나는 들키지 않으려 눈을 비비는 척 눈물을 닦았고 아빠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딸을 위해서 아빠도 저렇게 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절대 그러지 마, 아빠." 글로 적으니 '딸'이라 부르는 것이 느끼하게 다가오지만, 아빠는 정말로 나를 저렇게 부르곤 했다. 그때의 나는 열한 살이었다.


우리는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영화를 엄마 몰래 봤다. 대나무를 타고 아름답게 싸우는 <와호장룡>도 있었고 추리물과 시대극, 흑백 영화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조악한 무협 영화들을 함께 봤다. 그렇게 초등학생 시절이 지나고 시골집으로 이사 오면서 내가 중, 고등학생이 되며 우리의 주말의 명화는 잠시 잊혔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하기 전에 나는 가족들과 일 년 정도 시간을 보내고 싶어 집에 내려왔었다. 전보다 교회에 가는 시간이 늦어진 우리 가족은 토요일 저녁을 한결 느긋하게 보냈다. 그날은 너무 심심해서 아빠와 거실에 앉아 지상파 방송밖에 나오지 않는 TV를 켰다. 채널을 돌리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절대 보지 않던 EBS까지 갔는데, 마침 토요일 밤에 하는 '세계의 명화'가 시작됐다. 그날의 영화는 <오만과 편견>이었다. 이 또한 이전에 봤던 영화지만 그 아름다움을 또 보는 재미를 놓칠 수 없어 호들갑을 떨며 아빠에게 같이 보자고 했다. 영화는 정말로 공들여 만들어져서 어느 한 장면을 특별히 꼽기가 미안할 정도인데, 그중 나는 특히 이 영화의 두 가지 엔딩 중 오리지널 엔딩을 좋아한다. 그 엔딩은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나 다아시의 것이 아닌, 그녀의 아버지다.


똑똑하고 아름다운 딸 엘리자베스. 결혼하지 못한 채 나이 든 여자는 퇴물 취급을 받던 세상에서 사랑이 없는 결혼은 하지 않겠다던 딸에게 진심으로 사랑할, 그리고 진실하게 그를 사랑해줄 남자가 나타났다. 다아시는 초조하게 집 밖을 서성이고, 허락을 받은 엘리자베스는 기쁨에 달려나간다. 가난한 가족들을 위해 그냥 돈 있는 남자가 결혼하자고 할 때 눈 딱 감고 시집가라고 혼내는 엄마 앞에서 엘리자베스가 제발 살려달라며 아버지에게 매달리자, 그는 리즈가 만약 사랑 없는 결혼을 하면 다시는 자신을 볼 수 없을 거라 말하며 딸의 마음을 지켜줬던 아버지였다. 그는 지금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여 눈물 맺힌 눈으로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이다. 아버지의 얼굴을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이 장면을 아빠와 함께 보게 된다면 어떨까, 과거의 나는 홀로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장면을 아빠와 함께 보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아껴서 아무에게나 줄 수 없었던 딸, 엘리자베스가 정말로 좋은 사람과 진정한 사랑에 빠진 것을 마음 깊이 기뻐한다. 그 기쁨이 그대로 전달되는 그의 표정,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는 그의 몸짓, 그리고 기뻐하며 방에서 달려나가는 엘리자베스. 아빠와 함께 본 이 장면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나의 그러한 순간을 꿈꾸게 했다.


그 후로 아빠와 나는 매주 토요일, 세계의 명화가 시작할 시간이 되면 서로를 다급히 부르며 TV를 켰다. 그렇게 우리는 <대부> 시리즈도 전부 함께 봤고 오래된 흑백 영화들과 아주 최근의 재난 영화들도 함께 봤다. 상영 시간이 바뀌어 더 늦어지면서부터는 보기 어려워졌지만, 아빠가 수술하고 집에서 쉬는 동안에는 거의 매일 노트북으로 함께 영화를 봤다. 나는 먼저 영화를 보고 아빠와 엄마도 좋아할 만한 영화를 골랐다. 영화가 끝나면 늘 아빠는 개운한 표정으로 "잘 봤어, 딸."이라고 말했다.


매주 토요일 그 시간이면 서로 눈짓하며 다급히 움직여 함께 영화를 보던 것이 참 좋다. 가끔 엄마나 병희가 함께하기도 했지만 '세계의 명화'는 아빠와 나만의 약속이었다. 나는 그 주의 영화가 무엇인지 미리 기사를 검색해서 아빠에게 알렸고 그 주의 영화를 볼 것인지 우리끼리 다른 영화를 볼지 정하곤 했다. 가끔은 영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도 있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다음 주가 되면 또다시 같은 시간에 앉았다. 그 약속이 가능했던 건 함께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아빠와 그것을 배워온 나의 습관이었다. 그렇게 쌓인 시간은 어느 순간에 함께 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고, 그러면 대화할 수 있는 것이 많아져 점점 같이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함께 보고 듣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쌓여 추억이 되고 그렇게 관계는 깊어진다. 그게 아무리 아빠와 딸의 사이라도 말이다.


내가 상현이를 소개한 후에 아빠는 <아마겟돈>을 보며 나에게 했던 이야기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해서 나는 안심하기도 하고,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아빠의 말에 약간 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 아빠는 만약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지금도 진심이라고 했다. 나도 알고 있다. 아빠는 언제라도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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