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지 Dec 20. 2018

5. 그들만의 마라톤



하루는 엄마와 홈플러스에 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데 우리 앞에 한 엄마와 아들이 서있었다. 남자아이는 여섯 살 정도 돼 보였고 그 엄마는 그보다 더 어린아이의 발이 삐져나온 유모차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남자아이는 엄마의 곁에 가만히 서서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옆에 서있던 나의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저 정도 나이 남자애가 에스컬레이터를 가만히 타는 게 가능한 거야?"

"글쎄."

"병희였으면 벌써 손잡이 벨트 잡고 오르락내리락 난리였을 텐데, 저렇게 얌전하게 갈 수 있다니 난 너무 충격적이네."

엄마는 웃었다. 나도 웃었지만 그때의 병희를 생각하니 약간 피곤해졌다.


병희는 정말로 에너지가 넘치는 꼬마였다. 집에서도 절대 직선 코스로 다니지 않고 구불구불 끝에서 끝으로 뛰어다니며 올라갈 수 있는 모든 곳에 올라가서 아래로 뛰어내리는 스타일이었다. 놀이터에서도 미끄럼틀을 거꾸로 타고 올라가 그 위에서 계단 밖으로 뛰어내리고, 구름다리에 용쓰며 올라가서는 다시 아래로 뛰어내리고, 비가 오면 마당에서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아빠가 만들어준 나무 칼을 들고 입으로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홀로 외로운 수련을 했다. 힘이 넘치니 수업시간에는 쉽게 집중하지 못하고 늘 산만했다. 엄마는 그런 병희를 태권도나 합기도를 가르쳐 그 에너지를 쏟아내게 했다. 어린 병희는 도복을 입고 맨발로 뛰어다니며 그의 타고난 에너지를 맘껏 발산했다. 어찌나 튼튼한지 살면서 뼈 한 번 부러지지 않고 그렇게 바지런히 뛰어댕겼다.


그런 아들을 키우려면 아빠에게는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왜냐면 병희는 아빠와 놀고 싶어 했는데, 아빠는 일도 해야 하고 사람도 만나고 집에서는 설거지도 하고 교회에서도 일하고 그 모든 걸 감당하려면 운동도 해야 했기 때문에 병희까지 놀아주려면 더 많은 힘과 시간을 짜내야 했다. 병희를 놀아주는 것은 말 그대로 하드코어였다. 한 번은 아빠가 말을 태워주겠다며 팔을 뻗고 엎드렸다. 아빠의 등에 올라탄 병희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신나게 소리를 질렀다. "내 칼을 받아라!" 입으로 다그닥 소리를 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고 안 그래도 허리가 약한 아빠는 그 밑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등 위에서 병희는 혼자 칼로 적을 물리치고, 적의 화살에 맞기도 했다. 으악, 병희가 심장을 부여잡고 머리를 숙였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아빠는 곧 병희가 등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자세를 바꾸려 했다. 하지만 영웅은 죽지 않는다! 심장에 박힌 화살을 뽑아내며 그는 계속해서 달렸다. 힘들기도 하고 너무 신난 아들이 웃기기도 해서 아빠는 찡그린 얼굴로 끅끅거리며 웃었다. 엄마는 신나게 웃으며 옆에서 디카로 영상을 찍고 있었고, 나는 병희를 빨리 떨어트리려고 계속 활을 쏘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걔는 자꾸만 화살을 뽑아냈다. 어깨에서, 배꼽에서, 허벅지에서, 심지어 머리에서도. 웃긴 놈.


주말에 아빠는 아주 가끔 아파트 관리사무소 건물에 있던 탁구장에 병희를 데려가 함께 탁구를 쳤다. 병희가 아빠를 이길 수 있을 때까지 둘은 자주 탁구장에 갔다. 병희가 자라며 농구에 관심이 생기자 둘은 농구장을 찾아다녔다. 집에서는 장기도 뒀다. 이것저것 해봤지만 병희의 에너지를 다 쓰기에는 무리였다. 병희는 여전히 넘치는 힘을 쓰기 위해 놀이터로 뛰쳐나갔고 어떤 날은 아주 늦게까지 노느라 약속 시간까지 집에 오는 것을 잊어서 온 가족이 나가 병희를 부르며 밤이 되도록 찾아다닌 적도 있었다. 우리가 사는 아파트 앞 놀이터에서 놀고 일곱시까지 돌아오기로 했던 병희는 거기서 처음 만난 친구들과 다른 동의 놀이터로 넘어가 밤 아홉시가 넘어서야 집에 왔다. 그날 아빠와 엄마는 엄청나게 화가 났다. 병희는 잠긴 현관문 밖에서 울며 용서를 기다렸다. 엄마는 엉엉 소리 내며 구슬프게 우는 꼬마가 귀여워서 금방 화가 풀리곤 했다.


아빠의 취미는 탁구와 축구, 난에서 분재로, 분재에서 새 키우기, 사업을 정리한 후엔 돈이 안 드는 시와 한자로 번창해왔다. 병희가 이제 막 초등학교에 적응하고 있을 때쯤 아빠는 마라톤에 빠져있었다. 아빠는 꽤 오랫동안 마라톤을 했다. 마라톤 대회는 보통 봄과 가을에 열렸다. 아빠는 그맘때가 되면 대회를 준비하려 밤마다 코스를 바꾸며 동네를 달렸다. 아빠는 늘 엄마에게 사소한 것도 모두 말하곤 해서 달리러 나가기 전 오늘은 어느 방향으로 뛰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려주고 나갔다. 그러면 날이 따뜻한 밤에는 엄마는 나와 병희를 데리고 아빠의 운동이 끝날 시간에 맞춰 그 코스의 끝에 서있었다. 우리는 아빠가 보이기 시작하면 진짜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을 맞이하듯 팔을 벌리고 소리를 지르며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땀에 젖고 무거워진 몸으로 헉헉거리며 달려오면서 노란 가로등 아래에서 기다리는 우리를 보면 눈이 없어지도록 해맑게 웃었다. 아빠가 땀이 많이 났다며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해도 나와 병희는 자꾸만 아빠에게 붙었다.


아빠는 몇 해 동안 마라톤에 도전했다. 하프 마라톤을 여러 번 뛰었고, 42.195km를 달리는 풀코스를 두 번 완주했다. 풀코스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3-4시간 안에 마치고 들어왔고, 우리는 한참 더 아빠를 기다렸다. 점점 달리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이상하게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마라톤 중에 쓰러지거나 다치는 사람도 많다는데, 아빠에게 혹시나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걱정도 하고 아빠는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계속 코스 지도를 살피며 혼자 머릿속으로 따져보기도 했다. 아빠는 출발한지 4시간이 훌쩍 지나 거의 꼴찌로 들어왔는데, 엄청나게 지쳐서 우리를 보더니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엄마는 그 모습이 안쓰럽고 웃겨서 반은 울고 반은 걱정하는 얼굴로 아빠의 등을 두드렸다. 나는 너무 늦게 왔는데다가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빠가 약간 창피하고 대단하다 생각했다. 어쨌든 아빠는 거의 실신 상태로 들어왔지만 두 번 다 끝까지 해냈다.


아빠는 병희와 마라톤을 세 번 함께했다. 아빠는 병희와 같이 달릴 길이로 10km를 골랐다. 함께 달리며 대화도 하고 호흡과 발걸음을 맞춘 것은 서로에게 오래 남을 경험이었다. 아빠는 사소한 것부터 알려줬다. 신발 끈을 묶는 방법부터 어떤 옷을 입어야 편한지, 운동 전과 후에 어떻게 몸을 달구고 식히는지 가르쳐줬다. 병희는 늘 온 힘을 다해 달렸는데 그때마다 아빠는 힘을 빼라고 했다. 마라톤을 할 때는 자꾸 멀리 보지 않고, 내 발을 보며 작은 보폭으로 꾸준히 달려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발을 보지 말고 내 속도에 맞춰 달려야 한다고 아빠가 말했다. 아직 힘을 조절하지 못하는 병희에게 아빠의 발을 보고 맞춰 달리라고 했다. 아빠는 아주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병희는 아빠의 발을 봤다. 둘은 서로를 위해 자신이 뛸 수 있는 것보다 느리게 달렸다.


병희가 여덟 살이던 해 가을, 둘은 대청호의 마라톤 대회에서 달렸다. 아빠와 병희는 배에 번호표를 붙이고 출발선에 섰다. 연습할 때처럼 아주 천천히 시작했다. 그때 병희 옆으로 병희 또래의 어린 남매가 손을 잡고 이야아아아 하며 빠르게 달려나갔다. 어른은 없이 둘뿐이었다. 병희는 그 애들을 보며 마구 내달리고 싶었다. 아빠에게 그 애들을 이기고 싶다고 말했다. 아빠는 웃더니 계속 아빠의 발을 보고 달리라고 했다. "지금처럼만 뛰어. 조금 있으면 이길 거야."


아빠와 아들이 달리고 있으니 지나가던 아저씨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어떤 아저씨는 아들에게 같이 달리자고 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병희는 세상의 수많은 아들들 중 특별한 아들이 된 것 같았고, 아빠의 기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건 아빠의 사소하고 장대한 자랑 리스트에서 영원히 빠지지 않을 사건이다. 마라톤을 달리면 어느 지점마다 음료를 준비해준다.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머리에 끼얹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병희는 그게 그렇게 멋져 보였다. 아빠에게 머리에 물을 뿌리고 싶다고 했고 아빠는 마시던 생수를 병희 머리에 뿌려줬다


그렇게 3km 정도 달리니 아까 그 달려가던 아이들은 멈춰서 헥헥거리고 있었다. 병희는 아빠의 발을 보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똑같이 달려왔다. 정말로 그 애들을 이겼다. 아빠와 단둘이 연습할 때는 와닿지 않던 말들을 어린 병희는 이제 조금씩 이해했다. 정말로 처음부터 빨리 달릴 필요가 없었다. 정말로 내 속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한 거였다. 정말로 오래 뛰려면 힘을 아껴야 했고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아빠는 모든 일이 다 그렇다고 했다. 아빠는 그 후로도 늘 달리고 싶어 하는 병희에게 속도를 늦춰 지치지 않는 방법을 알려줬다. 나와 병희에게 운전을 가르쳐주던 아빠는 겁 많은 나에게는 자신을 믿고 좀 더 속도를 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빨리 달리려는 병희에게는 운전은 엑셀이 아닌 브레이크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양옆과 뒤에도 늘 차가 있다고 생각하고 조심하라고 했다. 열과 화가 많아 열정적으로 시작했다가 금세 지쳐버리지 말라고, 무엇이든 끝까지 하라고 했다.


아빠는 병희와 달리는 내내 한 번도 빨리 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병희는 계속 아빠의 속도에 맞춰 달렸다. 그래서 둘은 지치지 않고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별로 힘들지 않았고 처음처럼 계속 달릴 수 있었다. 끝은 언제 올까 조마조마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드디어 마지막이 다가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병희는 아빠에게 물었다. "나가도 돼?" 아빠는 대답했다. 병희는 아빠의 말이 정확히 기억난다고 했다. "이제 가."


속도를 올려 달리는데 골인 지점이 가까워졌다. 엄마와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병희는 우리를 보고 남은 힘껏 달리며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아빠도 병희의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 둘은 닮은 웃음을 지었다. 우리를 만나자마자 둘은 신나게 한 시간동안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우리에게 들려줄 일이 많았다. 아빠랑 병희는 전혀 지치지 않았고 누가 끝이라 말하지 않으면 한참은 더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4. 주말의 명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