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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Dec 31. 2018

6. 엄마는 꿈을 꿨는데,



아빠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아파트의 우리집에는 가구마다 빨간 딱지가 붙기도 하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그 아파트는 우리 집이 아니게 되었다. 그 무렵 엄마는 오랜 시간 사라져버리는 돈과 쉽게 그릴 수 없는 미래를 걱정하는 것에 지쳐버렸다. 엄마는 자연이 그리워졌다. 낙엽 타는 소리, 풀냄새와 흙의 감촉, 지붕에 부딪히는 빗소리와 맑은 밤하늘, 풀벌레 소리 같은 것이 그리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파트를 팔고 시골집으로 왔다.


마당이 있는 집은,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로망이 가득한 곳이지만 사는 사람에게는 해야 할 일이 많은 곳이다. 마당의 잡초는 뽑고 뒤돌면 다시 올라오고 잔디는 매주 깎아야 수풀이 되지 않는다. 봄이 오기 전에는 뱀이 들어오지 않도록 수시로 약을 뿌려야 한다. 봄이 되면 땅을 갈아엎고 비료를 뿌리고 장마가 오기 전에 수로를 다듬어야 했다. 장마에는 비가 새는 지붕을 수리해야 했는데, 물이 새기 전에는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찾기 어려워 미리 대비할 수가 없었다. 여름에는 벌레가 들끓고 수없이 고개를 드는 잡초와 싸워야 마당의 작물을 지킬 수 있다. 가을이 되면 거두고 말리고 씨를 잘 보관해둔다. 겨울이 오기 전에 나무와 수로를 감싸줘야 하고, 겨울에는 보일러가 얼어 터지지 않도록 기온이 낮아지면 수도꼭지를 살짝 틀어둬야 한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아 가스가 떨어질 때면 따로 주문해야 하고 보일러의 기름도 직접 사서 채워야 한다. 눈이 내리면 마당을 지나 길까지 쓸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린 날, 이 모든 일을 나눠서 하는 것이 아빠와 엄마의 일이었다.


역할을 나눠서 하기엔 아빠는 굉장히 느린 사람이었다. 자신의 일로 여겨지기 전까지는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집안의 구조를 바꾸려 하면 엄마는 일단 옮길 수 있는 것을 다 옮겨둔다. 혼자서는 옮길 수 없는 피아노라든지 장롱 같은 것들은 아빠의 마음이 동할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몇 주가 걸리기도 하고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마당의 무거운 것들을 옮겨달라고 엄마가 열 번은 넘게 말해야 사라졌다. 게다가 아빠는 부여의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는 주말이면 내내 잠을 자느라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화장실 바닥의 갈라진 부분을 다시 붙이는 것은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도록 되지 않았다. 엄마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안 해주더니 결국 내가 한다, 김낙호'라고 혼잣말을 했다. 엄마는 점점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먼저 시작했다. 병희와 내가 자라면서는 우리가 하기도 했다.


아빠가 농부였던 때, 아빠는 일반적인 농부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마을의 베테랑 농부들은 동트기 전 일어나 날이 뜨겁기 전에 일을 마쳤다. 하지만 아빠는 느지막이 일어나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을 시작했다. 가장 뜨거운 시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잡초를 뽑아도 하루에 반 골도 마치지 못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주말에 엄마와 내가 엉덩이 의자도 허벅다리에 끼고 목을 가리는 천이 덮인 모자도 쓰고 팔 토시와 각자의 호미를 들고 아빠의 밭에 전격 방문했다. 엄마는 한 골을 맡고 나와 아빠는 다른 한 골을 양쪽 끝에서 시작했다. 나와 엄마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잡초를 박멸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그런 우리를 보며 자주 허리를 펴라고 했다. 그러면 우리는 잠시 허리를 쭉 펴고 다시 호미질을 시작하기를 반복했다. 아빠는 우리가 오니 기분이 좋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정말 느리게 움직였다. 손을 천천히 내리고 뽑은 풀을 천천히 던졌다. 엄마와 나는 대화를 하면서도 폭풍처럼 몰아쳤다.


오후 여섯시쯤 되어 엄마는 한 골을 결국 마쳤고 나는 한 골의 반을 마치고 다음 골에 들어서 3할을 끝내고 있었다. 아빠는 그동안 반 골을 끝냈다. 아빠에게 이것 보라고, 이렇게 빨리할 수 있다고 자랑과 잔소리를 섞어 말했는데 아빠는 그저 흐흐 웃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종종 주말마다 아빠의 밭에 함께 갔는데, 아빠는 일이 빨리 끝나니 좋으면서도 우리의 잔소리와 너무 많은 노동량이 걱정되면서도 버거웠고 점점 티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빠의 밭에 가는 일은 점점 줄었다.


그런 아빠가 아주 부지런한 것이 있었다. 그건 대부분 가족의 안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시골집에 살며 우리는 원할 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을에 한 대 들어오는 버스는 배차 간격이 두 시간 반이 넘었다. 만약에 약속 시간이 두 시면 열두시 버스를 타고 나가 도서관이나 공원에서 기다리는 것이 익숙한 일이었다. 돌아올 때도 버스 시간을 맞춰 기다렸다 들어오거나 아빠 엄마가 움직이는 시간에 맞춰 함께 들어오곤 했는데, 아빠는 언제든 우리를 데리러 오고 태워다 줄 준비가 돼있었다. 아빠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먼저 와서 기다렸고 아빠가 늦게 오는 적이 없어 나는 늘 안심했다. 아빠는 늦은 밤에 잠을 자다가도 벨 소리를 들으면 벌떡 일어나서 역시나 십 분 전에 와서 기다렸다.


내가 고삼이었을 때 우리는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근처의 빌라에서 일 년을 지냈다. 겨울에는 시골집이 워낙 추우니 온 가족이 그 집에서 지냈는데, 아빠는 매일 저녁 혼자 시골집으로 들어가 진돗개들의 밥을 챙기고 보일러와 가스를 확인하고 나왔다. 혼자 다녀오는 게 외로울까 봐 몇 번 같이 간 적도 있었는데 아빠는 늘 괜찮다고 혼자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관리를 했어도 한파경보가 지나고 시골집의 보일러가 얼어 터져버렸다. 그날 나는 아빠와 함께 시골집으로 들어갔는데 온 집안에 발목이 잠길 만큼 물이 넘쳐있었다. 그날 아빠는 잠시 그 물속에 구두를 신고 들어가 집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해?"하고 물었고 아빠는 물을 퍼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지금 둘이 있을 때 같이 하자고 말했다. 아빠가 혼자 그것을 하는 게 싫었다. "둘이서 하면 혼자 하는 것보다 빠르잖아"하고 말했는데, 아빠는 "그렇긴 하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고 말했다. 며칠 뒤 아빠는 다시 혼자 가서 그 물을 모두 퍼내고 바닥을 닦아뒀다.


암이 아빠의 척추까지 퍼져 제대로 걷지 못하고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시골집의 수도가 얼었다. 날이 추워지니 수도를 꼭 틀어놓고 저녁마다 보일러를 돌리라고 아빠가 말했는데, 엄마는 거의 병원에서 지냈고 병희는 알바와 병원과 집을 오가느라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 부엌도 화장실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면 설거지도 할 수 없고 쌀도 씻을 수 없고 변기 물을 내릴 수도 없다. 아빠는 병실에 누워서 집을 걱정했다. 아빠는 자꾸만 자신이 가서 집을 봐야 하는데 그럴 수 없어 한숨을 쉬었다. 병희와 나와 상현이는 번갈아가며 아빠의 요청대로 모터 사진을 찍어 보내고 난로와 보일러를 돌리며 수도를 녹였다. 상현이는 생수 두 짝을 사서 포트에 물을 끓여 부엌의 수도를 열고 거꾸로 물을 붓기도 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결국은 친한 집사님이 전문가를 데려왔고 기계로 얼은 곳을 찾아 뚫을 수 있었다. 아빠가 없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아빠는 눈이 내리면 아주 부지런해졌다. 눈이 살짝 쌓였을 때도 미리 나가 비질을 했다. 쓸고 나도 어차피 눈은 그 위에 또 쌓이긴 하지만, 두텁게 쌓이기 전에 미리 쓸어두면 그 위에 눈이 내려도 쉽게 얼지 않고 다 쌓였을 때 쓸어내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우리 아랫집은 모두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살고 한동안은 아저씨들도 쓸지 않아서 아빠는 우리가 지나갈 길을 모두 혼자 쓸었다. 신장 암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온 1월에 상처가 아물 동안 눈을 쓰는 것은 병희의 일이었다. 병희는 아빠의 지시에 따라 눈을 쓸었고 아빠는 창가에서 그런 병희를 지켜봤다. 그리고 상처가 아물자 아빠는 다시 직접 눈을 쓸었다.


얼마 전 함박눈이 내린 날 아침, 병희는 아빠처럼 마당부터 우리 집을 떠나 이어진 길까지 눈을 쓸었다. 굵은 눈이 내려 지금 쓸어도 어차피 다시 쌓일 게 뻔했다. 엄마는 나중에 한 번에 쓸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병희는 그래도 아빠가 쓸던 것을 생각하며 마당을 쓸고 우리 가족만 사용하는 좁은 길까지 내려갔다. 맨손으로 비질을 하던 병희는 길의 끝에서 손도 너무 시리고 조금 귀찮아졌다. 그래서 마지막 몇 십 센티를 남겨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는 바로 그 부분에서 살짝 차가 미끄러졌다. 그래도 힘을 내서 집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알바를 마치고 돌아오던 병희는 그 부분에서 또 차가 미끄러졌다. 모닝으로는 그 빙판을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날 병희는 다시 아빠의 말을 생각했다. 어차피 다시 쌓이겠지만 그럼에도 미리 눈을 쓸어두는 것,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지만 그게 지혜였다.


얼마 전 가을, 시골집을 찾은 날도 엄마는 마당 일을 하고 있었다. 돌도 옮기고 나무도 옮기고 흙을 쌓고 풀을 메는 그런 일들. 오랜 시간 땀을 흘린 엄마는 지쳐 보였다. 나는 엄마를 도와 일을 하려 했는데 엄마는 이미 너무 오래 해서 더 못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의 감독 없이 나 혼자 일하는 것은 엄마의 일을 더해주는 것이라 우리는 집에 들어왔다. 꼬리치는 디태를 놀아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만에 목욕도 했다. 뜨뜻한 물에 몸을 불려 목욕을 하고 거실에 앉아 빨래를 접고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어제 아침에 꿈을 꿨는데, 아빠가. 무슨 공구를 들고. 겨울이었는데 우리가 수도를 살짝 틀어놨는데도 수도가 얼어버린 거야. 아빠가 그걸 고치고 있는데 계속 투덜투덜거리는 거야. 뭘 자꾸 투덜거려서 아빠한테 물었지, '자기 왜 짜증이 났어?' 그랬더니 아빠가 '안 하면 뭐라고 할 거잖아'. 그러더라고.


엄마는 깜짝 놀랄 때 짓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래서 내가 아빠를 안아줬다? 안아주면서 '미안해, 뭐라고 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랬다? 이런 꿈을 꿨네.


혹시 엄마가 울까 싶어 엄마를 힐끗 봤다. 엄마는 울지 않았다. "엄마가 생각하던 게 꿈으로 나온 건가?"하고 물으니 엄마는 "글쎄,"하고 말했다. 아빠를 보내고 엄마가 슬퍼했던 것들은 참 많았다. 허리 아프다고 했을 때 좀 더 일찍 병원에 데려갈걸, 치료를 받는 동안 울고불고 우겨서라도 일을 쉬게 할걸, 좀 더 일찍 자연치유를 시도할걸, 아빠를 좀 더 인정해주고 칭찬해줄걸, 더 사랑해줄걸,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마다 다른 길을 더 찾아볼걸. 엄마가 그런 것들을 말할 때마다 나는 가만히 들었다. 그리고 그냥 '아빠도 우리가 아빠 사랑한 거 다 알아, 엄마'라고 말했다. 정말로 엄마는 아빠에게서 암이 발견된 이후로 아빠의 곁을 비우지 않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오늘 엄마는 슬퍼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나는 다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엄마의 꿈 얘기를 듣고 생각했다. 나는 참 아빠를 많이 닮았다. 느린 것, 생각이 많은 것, 원하지 않는 일은 내 일로 생각하지 않는 것, 누군가 화를 내는 것이 두려운 것, 그래서 때로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 싸우기 싫은 것, 오래되고 익숙한 것들을 좋아하는 것, 미련해지는 것, 어쩌다 키우게 된 개를 마음 깊이 사랑하는 것, 작은 것에 감동하는 것, 감사하고 행복한 것, 슬픈 것, 그 외에도 많은 것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는 아빠를 참 많이 닮은 것 같아. 상현이도 나한테 너무 작은 것에 불평하지 말라더라고." 엄마는 "그래?"하고 말았다. "응 엄마 나는 별 이유 없이 짜증이 날 때도 많고 별것 아닌 거에 웃고 그래." 그래서 아마 아빠도 엄마에게 서운한 것들도 있었겠지만 또 별게 다 행복한 일도 많았을거다. 엄마가 행복한 꿈을 더 많이 꾸면 좋겠다. 꿈도 안 꾸고 푹 잔다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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